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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빛알

2012.10.17

[나의 선수시절65] 곽경근, 부천의 황금기를 함께 했던 공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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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선수시절65] 곽경근, 부천의 황금기를 함께 했던 공격수  [ 2012-10-16 ]
부천의 황금기를 함께 했던 스트라이커 곽경근 ⓒ이상헌
‘부천'하면 떠오르는 스트라이커로 곽경근(40)을 빼놓을 수 없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재미있는 축구의 대명사였던 부천 SK(현 제주)의 최전방을 책임졌던 이가 바로 곽경근이다.

곽경근은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도 출전했으며, 1998년 부천에 입단한 이후 2004년 은퇴할 때까지 K리그에서 통산 212경기에 출전해 36골-23도움을 기록했다. 그는 184cm-81kg의 당당한 체격으로 타겟형 스트라이커로서 맹활약을 펼쳤다. 현재도 곽경근은 챌린저스리그 소속이자 2부리그 진입을 꿈꾸고 있는 부천FC 1995의 감독으로 ‘부천’과의 인연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인천의 명문 초중고를 거치며 초대형 유망주로 각광 받아

곽경근은 초중고를 인천의 축구 명문에서 다녔다. 그는 부흥초를 거쳐 부평동중과 부평고를 거치면서 초대형 스트라이커 유망주로 각광을 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신체조건이 좋았던 곽경근은 부평동중 시절부터는 파워까지 붙었고, 100m를 11초7에 주파하는 등 스피드에서도 탁월했다. 그야말로 스트라이커로서의 조건을 모두 갖춘 셈.

언론에서는 그를 두고 ‘초고교급 공격수’, ‘제2의 최순호’ 등의 별칭으로 불렀다. 고2 시절에 이미 고교랭킹 1위 공격수였고, 전국대회 득점상과 최우수선수상도 수상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는 여러 포지션을 맡다가 6학년 때부터 스트라이커로만 뛰기 시작했어요. 그 때부터 제 또래보다는 키가 컸기 때문에 제공권은 좋았죠. 중1 때까지만 해도 힘이 부족했는데, 2학년 올라가면서 힘과 스피드가 붙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너무 빨리 크는 바람에 무릎 성장통이 굉장히 심해서 힘들었던 기억은 있어요.”

당시 부평고는 천하무적이었다. 곽경근의 2년 선배로 노정윤이 있었고, 1년 선배로는 이임생이 버티고 있었다. 곽경근까지 이 세 명은 부흥초와 부평동중, 부평고, 이후 고려대에서까지 함께 하며 단짝 중의 단짝으로 축구 인생을 함께 한 바 있다.

곽경근도 부평고 1학년 시절에 U-16 대표팀에 선발되면서 엘리트 코스를 밟기 시작했고, 2학년 말에는 U-19 대표팀에 뽑혀 고3 시절인 1990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AFC U-19 챔피언십 우승멤버로 활약했다. 그리고 곧바로 올림픽대표팀에 선발되면서 그야말로 초고속 성장을 거듭했다.

“아쉬운 것은 1991년 남북 단일팀이 참가했던 U-20 월드컵에 나가지 못했던 것이에요. 당시 저와 강철, 이임생, 조진호 이렇게 네 명이 올림픽대표팀에 선발되었는데, 나머지 세 명은 다시 재합류해 U-20 월드컵에 나갔거든요. 그런데 저는 발목을 약간 다치면서 합류하지 못했어요. 부상이 심하지 않았고, U-20 대표팀에서도 저를 원했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의외였죠.”

올림픽대표팀..크라머 감독과 만나다

부평고 3학년 시절인 1990년에 올림픽대표팀에 처음 뽑힌 곽경근은 팀의 막내였다.
당시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대비해 결성된 올림픽대표팀은 독일의 명장 데트마르 크라머 감독을 초빙해 대회를 준비했다. 곽경근에게도 크라머 감독과의 만남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크라머 감독님이 오시기 전에 동계훈련을 강도 높게 했었거든요. 그런데 감독님이 오시고 얼마 되지 않아서 스페인의 테네리페로 전지훈련을 떠났는데, 코디네이션 훈련을 주로 하면서 가볍게 훈련을 하는 겁니다. 모두들 의아했죠. 크라머 감독님의 지론은 훈련이 지겨워선 안 된다는 것이었어요. 의욕적으로 훈련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을 중요시하셨죠.”

“나중에 한국에 와서 훈련하는데, 밤에 동료들과 개인훈련을 하러 나갔거든요. 거기서 감독님과 마주쳤는데, 개인훈련을 왜 하냐고 그러시더군요. 우리가 보충하려고 그런다고 하자 쉬는 것도 운동이라고 하시면서 ‘낮에 운동했을 때 100%를 다하지 왜 밤에 낭비하냐. 운동시간에 집중해서 최선을 다한다면 힘들어서 밤에 운동할 생각조차 나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쉬고 내일을 다시 준비하라’고 말씀해주셨던 것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이후 곽경근은 올림픽대표팀의 주전 스트라이커로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참가했다. 최전방에 나선 곽경근은 노정윤을 중심으로 한 미드필드와 서정원과 정재권 등의 빠른 윙어들의 지원 속에 공격의 한 축을 담당했다. 그러나 좋은 경기 내용에도 불구하고 올림픽대표팀은 모로코, 파라과이, 스웨덴과 모두 비기며 3무로 탈락하고 말았다.

“팀 분위기도 좋았고, 전력도 최고였어요. 올림픽 전에 개최국인 스페인 올림픽대표팀과 평가전을 치렀거든요. 당시 스페인에는 과르디올라, 루이스 엔리케, 키코, 알폰소 등 좋은 선수들이 많았고, 실제로 그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던 팀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대등한 경기를 펼치면서 2-3으로 아쉽게 졌었죠.”

“스페인전을 통해 선수들이 자신감을 얻고 올림픽에 임했고, 실제로 자신 있게 플레이했어요. 아쉬웠던 점은 올림픽을 앞두고 크라머 감독님이 물러나시면서 선수들의 동요가 조금 있었다는 거예요. 크라머 감독님 체제로 올림픽까지 갔다면 좀 더 좋은 성과가 나오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드네요.”

곽경근은 모로코, 파라과이와의 1-2차전에 풀타임으로 뛰었고, 스웨덴과의 3차전에서는 후반 35분에 교체 투입됐다. 특히 스웨덴전에서는 결승골을 넣을 수 있는 결정적 장면이 있었지만, 아쉽게 놓치고 말았다.

“세 경기 모두 좋은 경기를 했는데, 결과가 아쉬웠어요. 한 경기만 이겼어도...마지막 스웨덴전에는 후반 중반 이후에 투입됐는데, 좋은 기회가 있었어요. 크로스가 올라왔고, 제가 몸을 날려 헤딩슛을 시도했는데, 살짝 스치면서 지나갔죠. 충분히 닿을 거라 생각했는데 너무 아쉽더군요.”

부천 시절의 곽경근 ⓒKFA 홍석균
십자인대 파열...불운의 시작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통해 국제경험까지 쌓고 돌아온 곽경근의 앞길은 탄탄대로일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94 미국 월드컵을 준비하는 대표상비군에 선발되는 등 유망주로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불운이 찾아왔다. 고려대로 돌아온 그는 경기 도중 전방십자인대가 파열되는 중상을 입었다. 결국 수술을 받고 재활을 거쳐 복귀를 했지만, 더 이상 예전 같은 스피드가 나오지는 않았다. 큰 체구에도 불구하고 빠른 스피드까지 갖추면서 초대형 스트라이커로 기대를 받았던 그에게 스피드라는 무기 하나가 사라진 셈이었다.

“오른쪽 무릎이 너덜너덜해진 상태였죠. 수술을 받았는데, 무려 27cm를 절개했어요. 수술 받고 재활을 했는데, 지금처럼 전문적인 재활센터가 없었죠. 체중도 불고 스피드도 안 돌아오더군요.”

“예전에는 드리블을 치고 들어가면 수비수가 떨어져나갔거든요. 그런데 복귀해서 경기를 하는데, 수비수가 안 떨어져나가더라고요. 제가 느려진 것은 생각 못하고 수비수들이 빨라졌구나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그 무렵부터 헤딩 위주의 공격수로 바뀌었던 것 같아요.”

고려대를 졸업하고 일본행

무릎 부상의 여파로 기대했던 94 미국 월드컵 출전도 좌절된 곽경근은 고려대를 졸업하고, 1995년에 일본 J리그의 우라와 레즈에 입단했다. 그러나 우라와에 가서도 부상이 그를 괴롭혔다. 이번에는 왼쪽 무릎을 다쳐 6개월간 재활해야 했고, 다음 해에 2부리그 소속이었던 후쿠시마로 팀을 옮겼다.

“3년을 일본에 있었는데, 축구가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것에 대해 많이 배웠어요. 생활이 재미있기도 했고요. 아내와 신혼생활도 거기서 했는데, 지금도 아내는 그 시절이 좋았다고 말하곤 합니다.(웃음) 인간으로서 성숙해질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죠. 다만 그렇게 있다 보니까 축구 선수로서의 존재감이 너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한국에 돌아오기로 결심했던 거예요.”

1999년 전북전에서의 곽경근 ⓒKFA 홍석균
부천에 입단..최전성기를 함께 하다

K리그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부천 SK(현 제주)에 뽑힌 곽경근은 구단의 기대에 완벽히 부응했다. 첫 해였던 1998년에 30게임에 출장한 그는 9골-2도움을 기록하며 부천 공격을 이끌었다.

“K리그 데뷔전이었던 포항전부터 골을 넣으면서 기세를 탔죠. 몸 상태도 좋았고, 주위 동료들의 지원도 좋았어요. 저에게 잘 맞는 팀이었습니다.”

당시 부천은 명장 발레리 니폼니시 감독의 마지막 해였다. 곽경근은 1년밖에 니폼니시 감독과 함께 하지 못했지만, 너무나 큰 가르침을 받았다. 지금도 곽경근은 존경하는 지도자로 니폼니시 감독을 꼽곤 한다.

“정말 신사셨어요. 선수들의 심리 컨트롤을 잘해주셨죠. 이 시절에 ‘니포 축구’라 불리면서 재미있는 축구를 구사했는데, 특히 제가 최전방에서 볼을 주고받다가 측면 침투하는 선수에게 넣어주고, 측면에서 벌리면서 크로스를 올리면 중앙에서 제가 해결하는 형태의 패턴도 많이 활용했어요. 재미있게 축구를 했죠.”

이 해에 부천은 필리모리스컵과 아디다스컵에서 모두 준우승을 차지했다. 전년도에 비해 성적이 많이 올랐지만, 우승 문턱에서 번번이 좌절하다보니 곽경근도 신인왕을 놓쳤다. 이 해에는 안정환, 이동국, 박성배, 정광민 등 쟁쟁한 선수들이 경쟁을 펼쳤고, 늦깎이 신인이었던 곽경근은 더욱 불리했다.

“첫 해에 우승을 차지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아쉽게 놓쳤죠. 신인왕도 처음에는 제가 거론됐는데, 그 때도 중고신인이라고 나왔어요.(웃음) 이후에 안정환이나 이동국, 박성배, 정광민 등이 좋은 활약을 펼치면서 저는 밀렸죠.”

1999년과 2000년, 니폼니시 감독의 뒤를 이어 조윤환 감독체제로 재무장한 부천은 최고의 경기력으로 축구팬들의 찬사를 받았다. 세밀한 ‘니포 축구’에 적절한 한국식 축구가 접목되면서 부천은 K리그에서 가장 재미있는 축구를 하는 팀으로 각광을 받았다.

성적도 뒷받침되어 1999년에는 정규리그 2위, 2000년에는 대한화재컵 우승을 차지했다. 곽경근 역시 1999년에 13골-8도움으로 생애 최고의 시즌을 보냈고, 2000년에도 9골-4도움으로 자신의 몫을 충실히 해냈다.

“1999년과 2000년에 축구가 정말 재미있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어요. 니폼니시 감독님의 축구를 조윤환 감독님이 한국에 맞게 접목시키면서 최고의 경기력이 나왔죠. 뛰고 있는 저도 재미있어서 흥분할 정도였으니까 보는 사람들도 정말 재미있었을 거예요. 부천 서포터들의 열기도 대단했었고요. 특히 수원과의 대결은 매 경기 명승부였고, 팬들의 열기도 엄청났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1999년 부천 시절의 곽경근(윗줄 중앙) ⓒKFA 홍석균
당시 부천은 윤정환, 김기동, 이을용, 윤정춘 등 화려한 미드필드진을 보유하고 있었고, 곽경근의 곁에는 이성재와 이원식 등 탁월한 스피드의 보조 공격수들이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

“아무래도 편했죠. 윤정환, 김기동 등은 또래 선수들인데, 제가 움직이는 것에 맞춰 적절히 패스를 넣어줬어요. 주위 동료들을 살려주는 플레이를 했죠. 또한 제 머리를 활용한 공격을 펼칠 때에는 이성재나 이원식이 돌아 들어가며 세컨드 볼을 잡아 공격을 펼쳤고요.”

“제가 헤딩에는 자신 있었거든요. 체공력이 있어서 공중에서 동료들 움직임을 보고 연결했어요. 공중볼 경합을 하면 10개 중 8개 정도는 따냈던 것 같습니다.”

“이 시절을 생각하면 선수들간의 신뢰와 팀 조직이 대단했어요. 최고의 선수들은 없었지만, 한 가닥씩 하는 선수들이었고, 서로 뭉쳐서 조직적으로 완벽했어요. 패스게임을 하면서 만들어가는 플레이를 펼쳤죠.”

2000년 대한화재컵 우승을 차지하며 부천에서의 최고 순간을 만끽할 당시의 곽경근(왼쪽에는 강철-이임생) ⓒKFA 홍석균
당시 부천은 윤정환, 김기동, 이을용, 윤정춘 등 화려한 미드필드진을 보유하고 있었고, 곽경근의 곁에는 이성재와 이원식 등 탁월한 스피드의 보조 공격수들이 호흡을 맞추고 있었다.

“아무래도 편했죠. 윤정환, 김기동 등은 또래 선수들인데, 제가 움직이는 것에 맞춰 적절히 패스를 넣어줬어요. 주위 동료들을 살려주는 플레이를 했죠. 또한 제 머리를 활용한 공격을 펼칠 때에는 이성재나 이원식이 돌아 들어가며 세컨드 볼을 잡아 공격을 펼쳤고요.”

“제가 헤딩에는 자신 있었거든요. 체공력이 있어서 공중에서 동료들 움직임을 보고 연결했어요. 공중볼 경합을 하면 10개 중 8개 정도는 따냈던 것 같습니다.”

“이 시절을 생각하면 선수들간의 신뢰와 팀 조직이 대단했어요. 최고의 선수들은 없었지만, 한 가닥씩 하는 선수들이었고, 서로 뭉쳐서 조직적으로 완벽했어요. 패스게임을 하면서 만들어가는 플레이를 펼쳤죠.”

부천FC 1995를 통해 다시 한 번 부천 축구의 부활을 꿈꾼다. ⓒ김유진
새로운 부천에서 감독으로서 도전에 나서다!

현역에서 은퇴한 곽경근은 여의도고 감독을 거쳐 현재는 부천FC 1995의 감독으로 재직 중이다. 부천을 대표했던 레전드가 이제는 새롭게 도전하는 부천FC 1995를 이끌고 있는 셈이다. 곽경근은 2부리그 참가를 선언한 부천에서 다시 한 번 옛 부천의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각오다.

“부천은 제 고향이고, 우리는 스토리가 있어요. 역경을 헤쳐 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모든 부천시민이 우리 팀이라는 개념을 갖고 응원할 수 있도록 준비할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곽경근은 어린 유망주들에게 조언 한 마디를 남겼다.

“멋있게 보이려고만 하지 말고, 정확히 플레이해야 합니다. 요즘 어린 선수들은 너무 겉멋에 빠져있어요. 어느 팀과 상대하더라도 얕보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신도 발전할 수 있어요.”

글=이상헌

* 대한축구협회 기술정책 보고서인 'KFA 리포트' 2012년 10월호 '나의 선수시절' 코너에 실린 인터뷰 기사입니다

1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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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셍로랑
2012.10.17

ㅇ ㅏ.. 진짜 옛추억 돋는 뉴스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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