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목동 경기장에서 열린 아디다스컵 개막전 전에 다른곳 개막경기 하나는 꼭 이야기 해야하기에 글의 시점을 일주일 정도 전으로 옮기겠습니다.아니 정확히는 20일 가깝게 더 전으로 개막전 들어가기 전으로 가야겠군요.1996년 아디다스컵을 1-2주 정도 앞두고 부산에 거주하는 수원서포터 한분이(누구인지 현 상황에서 이름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익명으로 처리하는거 때문에 거짓이라 하는 분이 계실겁니다만, 그분에겐 아쉽게도 실화입니다) 축구동 게시판에 도움을 요청하는 글을 올리셨습니다.부산구단쪽과 이야기해 본 결과 "서포터 응원방식을 아디다스컵 개막전에서 보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이게 뭔 말이지?이때는 IMF 이전이기 때문에 이 오더는 아무리 봐도 김우중 회장이 내린거 같았습니다.설명을 좀 하자면 당시 대우 축구팀은 다른 팀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지금은 K리그1, K리그2 에 참가하는 구단은 [독립채산재]라고 해서 별도의 법인으로 운영해야 합니다만, 이때만 해도 기업 구단은 모기업의 조직표에서 어디에 위치한 '부서'였습니다. 대부분은 '홍보팀'에 속해 있었습니다.당시 유공팀도 유공의 홈보팀에 있는 '축구팀' 부서였던 거죠.대우는 예외였습니다. 그렇다면 대우 축구팀은 그룹내의 어느 부서 소속일까요?비서실 산하에 따로 독립부서로 있었습니다. 김우중 회장이 손수 챙겨다닌 부서였습니다.괜히 김우중이라는 분이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축구성덕' 소리 듣는게 아닙니다. 그의 경제계에서의 과는 제쳐두고라도 '김우중' 이라는 분은 축구와 바둑이라는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 있어선 크나큰 업적을 남긴 사람입니다.김우중 본인은 현실 FM 해 버린 사람입니다.대한민국 프로스포츠 역사상 최초로 흑자구단 만든게 대우 축구단이기도 합니다.깜짝 놀라신 분도 계실 겁니다. 아니 대한민국 프로스포츠에서 흑자가 가능하다고요? 구라치지 마세요 라고 하실 분들도 계시겠죠. "기업 광고효과로 흑자효과 난거 아니냐"라고 하실수도 있지요.그런데 실제...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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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이 되었습니다.신년이 지난 뒤 얼마 뒤에 전화를 받았습니다."원석아 우리 수원삼성 응원하는게 맞는거 같다. 유공 응원은 이제 하지 말고 수원 응원으로 가자"???????이게 뭔 말이지?-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세요?"송년회때 리호승 대리하고 이야기를 깊게 했는데 수원삼성쪽이 유공보다는 지원이나 계획이 잘 잡혀있더라. 솔직히 1년동안 유공이 우리를 위해 얼마나 해 준게 있냐?"- 그 부분은 제가 주도적으로 한건 아니고 참가만 몇번 한거다보니 잘 몰라요"그런 부분이 있어. 유공은 우리를 알바 이상으로 생각 안하는거야. 제대로 축구응원 하려면 수원삼성으로 가는게 맞다. 너도 와라"- 잘 모르겠습니다. 고민좀 해야겠네요.대략 이런 정도의 이야기를 하며 끝냈습니다.머리가 혼란스러웠어요. 대화내용대로 그리고 앞에 쓴 글 내용대로 전 하이텔 축구동에서 유공 응원으로 나서서 얼마나 지원을 받았는지 등은 잘 몰랐습니다. 경기 끝나고 응원도구 정리하는 것도 시즌 막판에나 봤거든요. 스탠드 밑의 빈 방을 응원도구 보관용으로 내 줘서 거기에 응원도구 보관하는 걸 1995 시즌 마지막 경기 때 응원도구 정리하는거 도와주면서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나중에 목동 쓸 때에도 비슷한 위치(스탠드 밑)의 방을 하나 응원도구 보관하는 것으로 사용 가능하게 해 줬습니다. 1998년 이후에는 다른데로 옮겨졌습니다. 옮겨진 곳은 목동에서부터 응원하신 헤르메스 분들은 알고 계시는 그 위치입니다.)그 뒤로 별다른 연락은 없었습니다.칸타타에서 했던 송년회에서 이분들이 리호승 대리하고 계속 이야기를 하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때 이야기가 나온건가 싶었습니다.--------------------3월초에 대학로 근처의 '대여 카페'에서 모임이 있었습니다.수원삼성 팀에서 쓸 응원도구 등에 대한 것과 이번 시즌 응원에 대한 수원삼성 구단의 약간의...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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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6일 칸타타에 출근하자마자 송년회 준비 들어갔습니다. 테이블도 재배치하고 음료수도 새로 쌓아놓고 등등...일이 계속 있었습니다. 슬슬 한두분씩 와 주셨습니다.당시는 주6일 근무였던 때라 오전에 근무하고 수업듣고 오후에 오시기 시작한거죠.[칸타타가 있던 건물. 우정타워. 현재는 KUIC한국대학정보센터 가 들어와 있습니다.]유공축구단에서 저희의 업무를 맡아봐 주시던 김시문 대리님께도 연락을 보냈습니다.김시문 대리님은 혼쾌히 참석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계원 단장님은 아쉽게도 오지 못했습니다.그리고 또 다른 구단 직원이 참석하셨습니다. 1995년 가을쯤 '프로구단 창단'을 발표한 수원삼성축구단에서 리호승대리님이 오셨습니다.그래서 오기환, 이매리 두분은 식순에 구단 직원분들의 인사말 관련을 넣었습니다.김시문 대리님은 젊은분들이 이렇게 축구장에 와서 보여준 모습에 감사를 표했습니다. 내년엔 목동에서 하는 것 때문에 많은 준비를 하고는 있지만 교통 등에서 고민중이라고 이야기는 했고 언제든지 좋은 의견 있음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부천에서 오는 분들을 위해 부천역에서 출발하는 셔틀버스도 작지만 운영해 볼 생각이라고 이때 밝히셨습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는 이 셔틀버스를 타고 부천에서 목동으로 한번쯤 오신 분이 계시지 않을까 싶네요.삼성축구단의 리호승 대리님도 인사를 하셨습니다.초대 단장인 윤성규 단장님 이야기도 하시면서 일하는게 어떤 부분은 참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윤성규 단장님은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재독 교포셨습니다. 독일에서 오래 사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한국 상황과 달리 독일식으로 운영하려 하신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여담입니다만 제가 2000년에 대한민국 올림픽 대표팀이 네덜란드 아른햄 인근에 캠프를 차렸을 때와 2001년에 대한민국 월드컵 대표팀이 네덜란드에 캠프 차렸을 때 캠프 방문을 했던 적이 있는데 제가 간 날에 딱 마주쳐서 깜짝 놀랐던...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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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들어온게 있어 1995 시즌 이야기를 더 하게 되었습니다.   하이텔 축구동의 유공구단 응원이 몇달지나지 않아서 여름철이 되었습니다. 여름철이 되자 응원단의 일선에서 뛰던 몇몇분들이 "동대문에서만 응원하지 말고 지방에도 가 보고 싶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실행을 한 것입니다.   당시 수도권 팀 외에 구단이라면 포항/울산/부산/광양/전라북도 를 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표현하는 이유가 당시 전북 구단은 현재와 달랐습니다. 전북이라 불리긴 했지만 홈 경기장에 지금 전주월드컵 경기장이 아니다보니 전북의 몇몇 곳을 다녔습니다. 실제로 제가 1996년 아디다스컵 부천vs전북의 경기를 보러 간 곳은 이리공설운동장입니다. 이리는 지금의 익산입니다. 뭐 전주 부근이라면 전주 부근이지만요.   이분들이 가고 싶어했던 곳은 포항이었습니다. 당시 포항은 하이텔 축구동 회원들에게 있어서는 '꿈의 구장' 이었거든요. 개장된지 5년밖에 안된 새삥이기도 했고 종합운동장이 아닌 축구전용구장의 그 맛. 여러분들도 아시잖습니까? 근데 그 당시는 광양과 포항 딱 둘만 있던 때입니다. 그리고 광양보다는 포항! 이었지요. 그 이유는 당시 광양은 조명탑이 없던 때입니다. 놀라실것 같지만 광양에 조명탑이 설치된 것은 개장 이후 좀 되서였습니다. 그래서 여름철 야간경기를 보려면 역시 포항이었지요!   그래서 여름철에 유공 경기를 따라가는 것 외에도 주말경기때에 시간이 맞으면 응원가는 분들이 계시게 됩니다. 이때부터 '서포터의 원정응원'이 부천응원단을 통해 시작된 것입니다. 당시 응원을 주도하고 참가를 많이 (몇분은 개근하셨죠) 한 분들의 대부분이 수원 서포터로 1995년 말에 이동하셨습니다만 이 때는 부천서포터로 활동했습니다. 당시 서포터라는 말은 박철효님의 제안으로 쓰이기 시작했기에 응원단과 서포터라는 용어가 혼재해서 쓰이던...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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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시즌이 끝났지만 아직 이야기가 더 끝나지 않았습니다. 시즌이 끝나자 연고이전에 대한 언론 보도가 나왔습니다.   당시 서울은 일화, LG, 유공 이 세팀의 공동연고지였습니다. 서울을 연고지에서 빼고 일본 J리그처럼 '공동연고지'로 하자는 이야기가 나온 거죠. 김현회 기자가 논쟁을 일으켰으니 결국은 취재 부족을 드러낸 바도 있었던 사안인 '수도권 공동화정책' 이 이때 일입니다.   1994년부터 이 이야기가 나온 것으로 알고 1996년에는 동대문 운동장에서 방을 다 빼야 하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1995년 말에 연고지를 새로 정해야 했는데 유공은 부천으로 연고지를 정했죠. LG는 안양으로 정했고 일화는 천안으로 정했습니다. 이걸 놓고 '유공이 꼼수 부렸네' 라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당시 부천은 관중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스타디움'이 없었습니다. 부천시민회관 옆에 있는 '시민운동장'이 다였습니다. 그때 '공설운동장'이라고 불렀을 겁니다. 지금은 잔디밭이지만 그땐 맨땅이었고 콘크리트로 한면만 좌석 올라갔던 때입니다. 그걸 어떻게 아냐면 당시 부천으로 축구팀이 오자 부천 토박이 내지는 오래 사신 분들 중 조기축구회 등에서 활동하신 분들이 대환영 하셨고 이분들 중 일부가 PC통신에 가입하셔서 축구동 활동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당시 열심히 활동하시던 분 중에 ID를 AG909로 쓰시던 송관성 형님이 생각나네요.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초대받아서 방문해서 부천의 여러 조기축구회의 어르신들과 이야기도 하고 하다보니 알게 된 사정이었지요.     여튼 '부천에 경기장 짓기 전까지는 서울 목동 구장을 사용한다' 는 방침이 나오자 "어떻게든 서울에서 경기 하기 위해 꼼수 부린거다" "아 그래서 다른 두개 구단보다...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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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들어와서 하이텔 축구동이 커졌냐...면 그건 아닙니다. 당시 PC통신은 지금의 인터넷과 완전 달랐어요. PC통신 없으면 살아가는데 힘든 상황이 아닌 시대죠. 정말 하고싶은 사람만 하는 거였습니다.   이전 글에 말했지만 전화회선 사용해서 하던지라 전화비가 많이 들었습니다. ISDN 서비스를 신청해서 할수도 있었지만 이건 이 서비스 아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었고 14400bps라는 느린 속도도 제대로 안나오는 거라서 참 애매했던 시절이었지요. 그러다보니 동호회는 그리 커지지 않았습니다.   1995년 3월경으로 기억합니다. 하이텔 축구동에서 온라인 활동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앞에 말한 축구팀에서 활동하던 박중현 형이 채팅으로 저보고 만나자고 했습니다. 이때 보통 만나는 장소는 동대문운동장에서 많이 만났어요. 어디 번화가나 카페거리 보다는 동대문이 서로 만나기 편했으니까요.   대화의 내용은 대강 정리하자면 이랬습니다.   -------------------------------   "원석아 우리 축구팀 하나 응원하는게 어때?" 중현형의 그 말에 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 아니 우리가 독립적이고 어디 소속된 것도 아닌데 어느 한팀 응원을 하자고요?   "서양애들 응원하는거 봐봐 우리도 그렇게 함 해보고 싶지 않냐?" - 그렇긴 한데 그게 지금 될까요? 몇명이나 호응할까...   "함 해보자. 지금 생각은 유공팀 접촉해 보려고 하고 있어" - 잉? 거기 비인기팀인데...구단 운영도 별루 아녀요?   "그러니까 접촉해보자는 거지. 일화는 박종환 팬들이 많잖아. 그리고 LG는 서울 말고도 다른데서 경기 많이 하니까... 그리고 유공은 비인기팀이니까 응원한다고 가면 우리 도와줄 가능성이 높아" - 아...전 모르겠습니다. 일단 전 여기에서는 빠지겠습니다....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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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의 월드컵을 통해 하이텔 축구동은 한 단계 도약을 했습니다. 이런 기사가 나올 때 마다 가입인원은 한번 점프(?)를 하게 되었고 더불어 기존 언론이나 기업들이 PC통신에 게시판이나 여러 서비스를 하나하나 열게 되는 해였습니다. (그래봐야 아직 회원수 천명도 안되던 시절...)   축구동에서도 여러 게시판 활동을 하는 터줏대감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신동일 선생님을 처음 뵌 게 이 해이기도 합니다. 제가 1994년 여름에 '낫소'에 입사해서 직장인이 된지 얼마되지 않아 직접 뵙게 되었습니다. 동대문운동장에서였지요. 그때나 지금이나 제가 노안이다보니 신동일 선생님께서 절 처음 만났을때 첫번째로 하신 소리가 "당신 72년생 맞아?" 였습니다. 자기 또래처럼 보였다고 말이죠 ㅎㅎㅎㅎ   이렇게 1994년부터 회원들끼리 서로 만나서 축구장 가서 경기 본다던가 하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월드컵이 끝난 이후 아시안게임 보러 간다는 분도 계셨어요. 아마 서로가 몰랐지만 같은 경기를 경기장에서 보고 있던 분들도 꽤 되었던 때였습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과의 괴리랄까요? 게시판에서 싸우다가도 직접 경기장에서 만난다던가 해서 화 풀고 했던 건도 있었습니다.   1995년 초에 저의 인생에 엄청난 획을 그은 일이 있었습니다. 축구가족의 김신기 편집장님이 "원석씨 혹시 축구관련으로 인터뷰 할 인물 없을까?" 하고 물어보셨습니다.   "만화가 오일룡 선생님 어떨까요?"   축구가족에 매달 인터뷰 하는 코너가 있었는데 대부분 축구협회 관계자나 은퇴선수들 이야기만 나오다보니 뭔가 다른 인물을 인터뷰 하고 싶으셨기에 저에게 아이디어를 물어보셨던 거였겠죠. 고민끝에 내린 답이었습니다. 왜 그분이냐고 물어보셔서 "그분 축구만화만 그리시는 분입니다. 굳이 축구선수 출신이나 축구팀...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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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이 되었습니다. 1993년이 하이텔 축구동 만드느라 정신없이 지났습니다.   1993년 말에 PC통신에서 언론을 뒤흔드는 건을 제공했습니다. 일본 울트라 니폰이 걸어놓은 현수막 KEROA 였습니다. 물론 O와 E 자리에 바꿈을 표시하는 양방향 화살표를 붙여놓아 '오타'라는 것을 표시한 듯 했지만... "이거 일본어로 '하인'을 뜻하는 게로아를 표현한거 아녀?" 라는 말이 나온게 PC통신의 SPORTS란이었습니다.   이전까지는 기자들이 웬만큼 이런거 아는 분들이 드물어서 이건거 잘 못잡아냈습니다. 아니 그건 지금도 그렇습니다. 지금 SBS의 유튜브 채널에 나오는 고참기자인 '권종오 기자'가 만드는 영상 클립도 보면 이런 부분들은 전혀 잡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유도영웅 다무라 료코의 별명 '야와라'가 우라사와 나오키가 그린 만화 '야와라'에서 따온 것을 전혀 설명하지 못합니다. 이런 예들은 수두룩합니다. 이런거 잡아내 준게 PC통신들이었기에 많은 언론에서 PC통신을 점점 주목하게 되고 'PC통신 이용자 의견' 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둘씩 나오다가 1995년 넘어가면서 '네티즌 의견'으로 나오게 되죠. 여튼 '게로아'건은 하이텔 축구동의 작품이라고만 할 수는 없고 여러 PC통신 이용자의 작품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걸 전달을 한건 저였습니다.)   이제 1994년이 되자 미국월드컵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졌습니다. 대표팀은 1월부터 소집되서 2월에 미국으로 날라가 현지적응훈련을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때 축구동 부시삽 중 한명인 ToiEtMoi문선희 님이 저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친분있는 선수들에게 물어봤는데 숙소 놀러오라더라. 간 김에 하이텔 축구동 채팅방에서 선수들과 채팅 한번 주선할까?"   어어??? PC통신의 다른 동호회들 중에서 몇개 동호회에서 이런 이벤트가 있었습니다. 보통 게임회사의 게임 발표할...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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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호회가 만들어지고 글들이 우르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야기가 나온게 '오프라인 활동' 이었습니다. 글로만 하는게 아니라 직접 뛰어보자는 거.   그래서 조기축구회처럼 팀을 만들어보자고 했습니다. 가칭으로 'FC2002'라는 거 어떠냐고 제가 발제를 했고 다른 분들이 OK해 주셨습니다. 네 아시다시피 그때 대회개최지 결정은 안났지만 유치경쟁이 엄청 불 붙었던 때입니다. 그래서 2002라는 말을 팀이름에 넣자고 했는데 바로 OK사인 내 주시더군요. 모임은 연세대학교 운동장에서 자주 있었습니다. 거기 조기축구회하고 같이 쓰면서 매주 주말에 모였습니다. 저는 어쩌다 한번 나가는 정도였고 정기적으로 나가지는 않았어요. 여튼 여기서 활동하는 많은 분들이 이후 제 뒤를 이어 대표시삽으로 계속 하이텔 축구동을 이끌어주시게 됩니다. 이렇게 동호회 활동이 하나 더 확장되었습니다.   ---------------------- 하이텔 축구동 초창기에 어떤 한 분이 가입하셨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SOCCER KOREA' 라는 인터넷 사이트를 기억하실까요? 이거 기억하는 분 계시다면 진짜 올드팬이십니다.   지금은 여기저기서 쓰고 있어서 '쇼핑몰 아니냐' 하실수도 있는데....   아닙니다.   당시 한국에서 인터넷 접속할 수 있는 대학교는 한손 안으로 꼽을 수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제가 다녔던 광운대학교였습니다. 그리고 SOCCER KOREA는 포항공대 호스트 쪽에서 나왔습니다. 처음엔 광운대의 네트워크 동아리 'K-NET'에서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서칭하다가 발견했다면서 저에게 알려줬습니다. K-NET은 당시 정식 동아리는 아니었지만 이미 네트워크실의 죽돌이/죽순이 들이었고 거기서 전 하이텔 동호회 시삽이라고 1기로 합류시켜 줬습니다. 거기서 전 인터넷을 처음으로 접해봤습니다. 어쨌던 한국 축구관련 인터넷 주소가 있다는 것은 정말 신기해서 슬쩍...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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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즈음 해서 하이텔 본사에 한번 들러야 했습니다. 이후에는 사라졌지만 그때만 해도 새로 만들어진 동호회 대표들에게는 '교육'이 있었거든요. 하이텔의 메인 게시판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이텔 시스템의 일부의 글(컨텐츠)에 대해 [삭제] 권한이 있던 만큼 저작권에 대한 간단한 교육과 동호회 운영을 위한 여러 게시판 명령어. 운영메뉴에 대한 안내 게시판 글의 삭제명령, 게시판 이름 바꾸기 등에 대한 것들에 대한 짧은 교육이었습니다.   부족한 교육일지 몰라도 새로 만들어지는 동호회 대표들과의 잠깐이지만 얼굴 마주치는 기회를 가질 수도 있었고 해서 케텔 시절부터 계속해서 있던 교육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이텔 축구동이 생긴 1993년 9월을 계기로 이 교육은 없어졌습니다. 최후의 교육이었죠.   왜 그렇게 되었는지 나중에 알고보니 '소모임' 서비스의 신설과 동호회 개설이 쉬워지면서였습니다. 동호회 개설이 이전처럼 연 2회가 아닌 매월 열게 되었고 이와 함께 '소모임' 이라는 서비스가 열리게 되서 너무 많은 게시판들이 열려버리게 되었다는 거죠. 그래서 이런 교육을 하기가 쉽지 않게 된 겁니다. 제가 교육 받을 때만 해도 20여명밖에 안될 정도로 '동호회 개설' 이라는 것 자체가 당시 빡셌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서너번 '빠꾸'당한 곳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걸 한방에 뚫었던 겁니다. 분명 축구와 야구가 인기있는 스포츠인데도 오레된 케텔에서도 동호회가 없던게 의아했었는데 이때야 알았어요. 그만큼 케텔-하이텔에서 동호회 하나 만드는게 대단한 거였습니다.    그리고 공지된 개설일 00시. sysop ID로 로그인을 했습니다.   ID : k2soccer   역사적인, 이 나라 최초의 온라인 축구동호회의 운영자 아이디입니다....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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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들고 하이텔에 들어간게 6월 말이었습니다. 이때 한번 항의를 쎄게 했습니다.   "이렇게 기사까지 나왔습니다. 여기서 아직 하이텔이 승인해주지 않았지만 활동중이라는 내용까지 있습니다. 저희 말고도 준비하는 다른 동호회들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사태가 오래되면 하이텔도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강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난감해 하시더군요. 결국 처음 저희를 담당하던 분은 곧 그만두시고 담당자가 바뀌었다는 연락을 7월초에 듣게 되었습니다. 괜히 들고갔나...싶었지만 멈출 순 없었습니다.   '야구동호회하고도 함 연합해 볼까?'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고 하이텔의 sports 란에는 슬슬 '동호회가 정식 개설이 안되고 있다'는 글들이 여기저기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게시판 하나로는 야구동호회건 축구동호회건 불만이 계속 쌓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글을 쓰는 ID가 겨우 20여개만 보이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이 기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했고 이미 진행시켰죠. 6월22일에 스포츠 서울 보라고 슬쩍 스포하고 그리고 22일에 이렇게 기사 나왔다고 21일 오후6시경부터 sports란에 글을 썼습니다. 기사나왔다고 좋아하는 축구동 분들도 많았지만 반면 분노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하이텔 뭐하는거냐고 말이죠.   이를 기점으로 하이텔 내에서 파업에 관한 여론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저런 게시판들이 불편외에도 '이거 운영 뭐하는거지?' 하는 말들이 나왔죠.   김신기 편집장님의 작전이 성공한 거였습니다. 7월 말이 되었습니다. 하이텔 측에서 본사에 함 와달라고 하더군요. 갔습니다.   "늦어도 9월에는 이야기가 나올겁니다. 제발 그때까지 참아주세요" > 앞으로 두달 정도요? 아니 그동안에 뭐가 바뀝니까? 일단 담당자분이 지금 바뀌었군요. "네 제가 책임지고 9월까지는 해결하겠습니다"   뭔가...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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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하이텔 축구동호회의 운영진 변화가 있었습니다.   여성 부시삽이었던 jjeowl정지은 누님이 부시삽을 사퇴하셨습니다. 당시 "한도컴퓨터"에서 근무하셨는데 회사 업무가 빡세지기 시작했다고 하셨어요.   '한도컴퓨터'라는 회사는 한글카드로 유명한 회사였습니다. 당시는 PC의 OS가 윈도우나 리눅스가 아닌 DOS였습니다. DOS는 기본적으로 영어만 가능했고 한글을 쓰려면 소프트웨어적으로 특정 어플에서만 구현되던가(한글 같은 워드프로세서가 그랬죠. 그래서 한글 저장시에 보면 KSSM, KS5601이라는 텍스트와 한글 HWP는 다른 저장방식이었습니다) 한도에서 나온 [도깨비] 라는 카드를 슬롯에 장착하고 메인 메모리에 DKB4(1990년대 초반의 버전이 4버전이었습니다)를 띄워놓고 특정 명령어키로 한글을 억지로 구현시켜야 했습니다. 물론 윈도우3.0, 3.1의 한글화 버전이 나오고 OS가 WINDOWS95가 나오면서 현재와 같은 GUI식으로 바뀌며  도깨비5 버전이 마지막이 되었습니다만. 이때 jjeowl정지은 누님은 한도에서 스프레드시트(엑셀 프로그램이라 생각하심 됨)개발을 하고 계셨었는데 이 부분 개발관련으로 난항을 겪고 있던 것으로 압니다. 이 '한도컴퓨터'는 지금도 있는 회사입니다.   어찌되었던 jjeowl정지은 누님 이후에 ToiEtMoi문선희 님이 후임자로 지원하셨어요. 이분도 나름 대단했던 분입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에 계셨었는데 이때 대한민국 올림픽 대표팀에 자원봉사를 스스로 나서셨던 분이었어요. 근데 그건 모종의 이유로 중간에 그만두셔야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또 풀겠습니다. 관련해서 문선희님이 대한민국 최초로 행한 건이 있습니다. 앞서 '하이텔 축구동호회는 한국 축구문화와 인터넷 문화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문장이 있었죠. 그 기여중에서 ToiEtMoi문선희님의 활약이 있었습니다. 이건 추후 글에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여튼 하이텔 파업 기간동안에 이런 일들이 계속되다보니 많이 지쳐있는 상황에서 김신기님의 이 제안은 큰 힘이 되었습니다. 홍보를...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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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의에 빠져 있으면서 일단 지켜보기만 했던 어느 날 메일이 날라왔습니다.   "축구협회 기관지 '축구가족'의 편집장 김신기입니다. 언제 한번 뵈면 좋겠습니다. 연락처는 XXX-XXXX 입니다"   에??? 이게 뭔일이지? 축구협회에 기관지가 있었다고? 첨 듣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던게 외부에 안돌고 그 안에서만 도는 잡지였으니까요. 그러니 축협 직원이나 관련자가 아닌 저는 당연히 몰랐죠. 일단 궁금하기도 해서 연락했습니다.   편집부는 여의도에 있었습니다. 축구협회 내에 있지 않았어요. 알고보니 정몽준 회장이 만든 잡지나 다름 없었습니다. 여의도의 한서빌딩 안에 있었습니다. 다행히 집 근처에 여의도로 가는 버스가 있고 그 버스가 한서빌딩 근처에 섰습니다. 대신 뺑뺑 돌아갔습니다. 그땐 지하철 5호선 없던 때고 환승할인도 없던 때라서 그냥 한번에 그 버스 타고 갔습니다.   여튼 편집부에 들어서자마자 김신기 편집장님이 굳게 악수하셨습니다. PC통신을 여러 이유로 하고 있었는데 하이텔에 축구동 있는걸 얼마전에 알았다고 했습니다. 대표팀 경기를 모여서 보러 간 것도 알고 계셨어요. 지켜보고만 계셨는데 도와주고 싶다면서 연락을 하신 거였습니다. 와...너무 기뻤습니다. 축구협회 분들이 우리 움직이는걸 이렇게 알고 계셨다니.   그리고 놀라운 일이 또 벌어졌습니다. 당시 인기작가인 고원정 선생님이 쑤욱 들어오시더라구요. 고원정 선생님을 저에게 소개시켜 주셨습니다.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당시 [최후의 계엄령] 이라는 소설이 대히트를 쳤는데 집필실이 바로 위층이라는 겁니다. 거기다 고원정 선생님도 축구 아주 좋아하신다고 하면서 자주 오신다고 했습니다. 이 인연으로 유치전에 활발하게 진행 될 때 MBC에서 만든 축구 다큐멘타리를 고원정 선생님이 집필하셨는데 그...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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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게토레이배 축구대회 관련해서 결국 하이텔에서 가장 큰 동호회인 [OS 동호회]의 대표분을 만나서 상의도 했었습니다. OS동호회는 용산 선인상가 21동 꼭대기층에 매장을 가지고 있었죠. 당시 OS동호회라 하면 PC통신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절대적인 영향을 가진 동호회였습니다. 가장 크고 가장 많은 회원수를 가지고 있는데도 PC에 있어서 초고수들도 많았습니다.   PC관련해서 최초의 공동구매를 주관하고 운영한 곳이 바로 OS동호회였습니다. 그러니 '동호회 모두 참여'하는 뭔가를 하려면 여기를 가야 했지요. 회원수만 30만이 넘는 거대동호회였습니다. 지금 봐도 회원수 30만이 넘는 동호회면 '듣보르잡'동호회 아니잖아요? 근데 30년전에 30만회원? 엄청난 동호회인거죠. 하이텔 축구동이 '더부살이'하던 고전게임동호회도 10만은 넘는 회원수를 가지고 있었지만 OS동호회하고는 쨉이 안됬습니다. '하이텔 10대 동호회'를 '서비스이용시간'으로 서열정리를 했는데 OS동호회는 하이텔이 서비스 완전종료 하기 전까지도 1등 자리에서 거의 내려와본적이 없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스포츠관련 동호회는 10대 동호회에 들어갔던 것은...1997년 10월-11월에 하이텔축구동호회가 딱 두번 들어갔었습니다. 당연 붉은악마 열풍 덕분이었죠. 야구동도 10대 동호회에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과는 많이 다르죠.   여튼 OS동호회 대표님을 통해 어떻게 진행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진행시켰습니다. 몇가지 안을 보여드렸고 OS동호회의 대표님도 '좋은 뜻인데 이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모이게 하나요?'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힘들지만 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아마 경기 장소는 특정한 곳 몇군데에서 나눠서 해야 할것 같다고 했고 경기방식도 45분 풀타임이 아닌 30분 타임 등... 많은 이야기가 진행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만나서 진행하려는데 2주만에 전화 한통으로 바스스스 무너졌습니다. 이게 무슨 일이었을까?  ...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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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토레이배 3on3 농구대회를 기억하십니까?   1990년대 초반에 3on3이 인기를 얻자 게토레이가 후원에 나서 만든 대회입니다. 상당히 핫했죠. 위키백과에서는 한국에서 3on3의 시작을 2015년을 시초라고 하지만 실제는 아니었습니다. 1990년대부터 이미 3ON3 대회는 있었고 음료회사의 지원도 있었습니다. 그 3on3에 대해서는 하이텔 축구동호회의 지분도 어느정도는 있지 않았을까? 하는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합니다.   후원업체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james008 양현덕 님은 게토레이와 접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축구대회를 열어보는 것에 대해 접촉했고 승인을 받아냈습니다. 와...이거 만든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게 되나? 양현덕님의 그런 진행능력은 정말 좋았죠.   좋은 소식을 가져오자마자 바로 하이텔의 모든 동호회가 몇개인가를 놓고 숫자를 세기 시작했습니다. 대략 300개가 넘었습니다. 회원수는 몇명인지도 알아보고 해서 이런 DB가 쌓였습니다. 월드컵 지역예선 시뮬레이션 표 만드는 느낌이었습니다. 본선 티켓을...분야별 동호회별로 몇장을 줘야 할지. 그리고 동호회 숫자가 적은 분야는 몇장 줘야 할지 아님 회원수 별로 또 몇을 해야 할지...그러면 특정 동호회는 2장 이상을 둬야 할지 고민고민이 계속되었고 안을 계속 만들면서 이때 운영진 넷은 몰래 채팅방을 만들어서 이야기 하느라 바빴죠.   그런데 고전게임동호회의 이순화 대표시삽님이 소식을 하나 알려주게 됩니다. "조만간 신작게임 발표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에 축구동호회 소개 시간을 만들까 하는데 어떠세요?" 두말할 것 없이 승낙했습니다. 발표하는 게임은 RPG게임의 명작 중 명작으로 꼽히는 '울티마'. 정확히는 '울티마 7'의 속편 "Serpent Isle" 의 발표회였습니다.   발표 장소는 용산 "전자월드" 건물 지하의 하이텔플라자(장소이름이 맞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였습니다. 하이텔...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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