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폼 이야기. 유니폼 이야기가 이전부터 나와서 언제 할까...고민하다가 계속 뭔가 게시판 이슈가 터져 계속 미루다가 이제야 하게 되었습니다.대한민국에서 축구장에 유니폼을 입고 오는 문화는 언제부터였냐?라는 질문에 답을 한다면 '의외로 오래되었다'는 것이 답입니다.오래전 1970년대 부터까지라고 할수도 있을지도요?이미 전 1980년대에도 축구장에 유니폼 입고 가는 분들 봤었습니다. 제가 1986 아시안게임때에 아버님이 표 사주셔서 아시안게임 축구경기 입장해 봤거든요. 학교에서 강매해서 본 것은 육상경기였습니다. 이때 임춘애선수가 금메달 딴 경기였는데 10월 3일이었나? 여튼 10월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1988 올림픽때도 강매해서 경기 무조건 보러 가야 했습니다.)이때에도 유니폼을 경기장에 입고 가는 분들이 계셨어요. 어떤 분들이었냐면 조기축구 하는 분들이었습니다.휴일에 운동하고 그 유니폼 입고 그대로 경기장 오신 분들인거죠.이분들이야 말로 어찌 보면 한국축구문화를 선도한 분들이라 할수도 있겠네요경기장 오기 전에 한잔 거하게 드링킹하고 경기를 보면서 욕설 한바가지를 쭈악 쏟아내고 경기장 최 상단에 올라가서 부르스타에 삼겹살 올려놓고 계속 소주와 막걸리를 이트드링킹 한 분들이십니다.이건 1996년에도 자주 볼 수 있었던 풍경입니다. 이 풍경에 대한 큰 전환점은 1997년의 '붉은악마' 열풍이라고 생각합니다. 차차 이야기를 더 끌고 가야겠습니다만 이 문화 관련해서는 아마 2002년까지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네요, 어쩌면 대하드라마가 될것 같습니다.이런 분위기는 아마도 1970년대에 MBC에서 방송해준 '분데스리가' 녹화방송과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만. 이건 저보다 더 연배가 높은 분께서 보충해 주셔야겠네요.여튼 1995년과 1996년에는 유니폼 없이 다녔습니다.기껏해야 유공구단에서 구단회원이 되면 증정해 주는 단체 티셔츠를 입고 경기장에서 응원했습니다.초창기 응원사진에 있는 진한 하늘색 티셔츠가...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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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나우두님이 글을 써 주셨는데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 좀 글이 늦어졌습니다.어떤 노래를 말하는가 했더니만...Steam 이라는 밴드가 부른 Na Na Na Na Hey Hey-ey Goodbye라는 노래의 도입부분을 말하는 거였더라구요.원곡 들으실 분은https://youtu.be/IoyvvEWHodk이 영상 보시면 됩니다.이게 1960년대에 나온 노래입니다.(1969년 발표로 압니다)이 노래와 쓰임새가 한국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1990년대 초입니다.이 노래의 보급에 앞장선 것은 의외로 메이저 방송사입니다.SBS요.1990년 SBS가 개국했을 때 여러 공격적인 방송으로 시청율 확보를 하려 했습니다. 이때 한 것중 하나가 NBA 중계입니다.그동안 NBA중계가 없던 건 아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도 1980년대의 이른바 Laker's vs Celtics 시리즈로 유명했던 때에 MBC에서 주말에 이 두팀의 파이널 경기를 몇번 틀어줬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처럼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아버님이 체육교사셨습니다) 사람은 AFKN 이라는 주한미군을 위한 방송을 보면서 미국의 여러 스포츠들을 접했습니다. 저는 AFKN으로 농구뿐 아니라 미식축구, 아이스하키를 봤습니다.(심지어 1986년엔 멕시코 월드컵도 AFKN에서 틀어줬습니다) 저 말고도 당시 스포츠나 엔터테이너 관련 좋아하는 분들은 AFKN 자주 봤을 겁니다. NWA라던가 WWF(현재의 WWE)같은 프로레슬링도 토요일 오후2시에 봤으니까요.이랬던 때에 공중파에서 NBA를 평일 저녁에 고정으로 해 준 것은 SBS가 최초였습니다. 당시 농구의 인기가 상당히 높아서 자체적으로 프로전환 이야기가 나왔었죠. 아니 외국 선수만 없었지 그냥 프로였습니다. 대학농구도 인기 좋았던 때고요. 문경은 선수가 덩크했다고 다음날 스포츠신문 1면에 나오던 때로 농구의 인기가 좋았던 때입니다.그러다보니 SBS는 방송 송출 얼마 뒤에 실업농구단도 만들었습니다.현재 안양의 정관장 레드부스터스가 이 농구단을 모태로 하고 있습니다.이러면서 당시 미국스포츠의 문화가 자연스레 소개됩니다.이...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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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국지몽요즙 갑자기 응원가 문제가 이야기 나오다보니 응원가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1980년대 축구장에서야 응원가는 너무 뻔했습니다.노래 몇개, 유행가 몇개 부르는게 다였거든요.치어리딩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아마 1980년대의 치어리더들이 지금 야구장에 가면 그 자리에 서지도 못하고 '치어리딩이 이리 빡센거였음?' 이라 할지도 모릅니다.아 물론 당시 미국 대학교 치어리딩팀은 차원이 달랐지만 한국에서도 그정도 까지 되는 퍼포먼스는 치어리딩팀에서도 보기 어려웠습니다.서포터도 크게 다르진 않았습니다.여러 노래들을 사용하긴 했고 구호나 음을 따라하는 것부터 시작했습니다. 독자적인 리듬은 바로 나오진 않았어요.이런 부분은 당시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부르기)라는 문화에서 시작되었다고 볼수도 있겠습니다만...원어를 그대로 부르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었으니까요.이 부분은 분명 한국보다는 일본이 앞서 있었습니다.1990년대 중반 이후 인터넷을 접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있었지만 정작 '노래'를 들여오는게 쉽진 않았습니다.결국 하이텔 축구동호회 회원분들 중 해외 많이 다니면서 이런 음악이 들은 CD를 사온 분들 몇이 나섰습니다. 앞서 말했던 일본통 박철효형님이 많은 음반을 가지고 계셨죠.요즘같음 이런 음악들을 유튜브에 올리거나 축구동호회 자료실에 올려서 공유하고 했을텐데 당시는 이런게 쉽지 않았습니다.컴 잘 다루는 사람 아님 이거 쉽지 않았고 음악일에 종사하는 사람들 아님 음원 추출은 집에 컴이 있어도 쉽지 않았어요.요즘 PC들은 메인보드에 사운드카드가 내장되어 있고 이 내장 사운드카즈의 성능이 꽤 좋습니다. |그때는 컴에서 나는 소리는 비프음(삑~ 삐이~ 삐빅~ 하는 소리요... 이거 메인보드 에러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몇번 울리냐에 따라 어디 문제인지 아시는 분들은 진짜 PC박사임)이 전부였고 WAV들으려면 최소 일제 사운드마스터나 국산 '옥소리'카드나 지금도 유명한...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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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목동에서 열린 경기는 그야말로 골잔치였습니다.4:3으로 승리한 게임도 나왔고 3:2 경기는 뭐 단골이었죠.이때 목동에서의 골 폭죽으로 스포츠 서울에서는 '목동에 골 보러 오세요' 라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경기가 이기건 지건 화끈한 내용들이 연속으로 나왔습니다.이때 하이텔 축구동에서 활동하시는 타 팀 팬 분들이 오셔서 경기를 직관하시곤 했습니다. 당시 TV 중계가 많이 없다보니 힘들게 직접 오셔서 경기를 보셨습니다. 여름에야 오목교역이 개통했기 때문에 영등포구청 역에서 버스타고 와야 함에도 많이들 오셨습니다.그래서 이때 게시물들 중에는 '내가 응원하는 팀이 이겼지만 축구는 부천이 잘했다' '와 유럽축구보는 줄 알았다' '패싱플레이 왜 이렇게 잘하냐' 등등의 극찬 글이 게시판에 여러개 올라왔던 때였습니다.'니포축구'의 정점이었다고 감히 말해봅니다.문제는 이 과정에서 김기동 선수의 전력이탈도 나왔습니다. 김현석(현 전남감독) 선수가 김기동 선수가 킥을 하는 과정에 축구화를 갖다대서 무릎이 박살나버린 사건이었습니다.이때 전치 6주 나왔는데 아무리 봐도 6주만에 끝날 부상은 아니었습니다.구단 관계자 분에게 여쭤보니 "병원에서 6주 이상의 진단은 안내준다. 그 이상 진단이면 사실상 사망이라고..."이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그때 그렇게 들었습니다.이런 큰 부상을 겪고도 그 부상 이겨내고 부천과 포항에서 선수생활을 오랫동안 이어간 김기동 선수가 정말 대단한거죠.그리고 그 골폭죽이 계속되던 여름 초입에 스포츠 서울에 가서 김덕기 캡틴에게 제안을 했습니다.-부장님. 지금 리그 상황을 보니까 부천의 조셉과 포항의 라데가 기록한 공격포인트가 심상치 않습니다""흠? 그래요?"-리그 이제 절반쯤 갔는데 조셉이 5골4어시스트고 라데는 6골5어시트거든요. 이 추세로 가면 둘중 누구 하나는 시즌 끝나고 10골10어시스트 넘길거 같아요. 야구에서도 MLB는...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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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단 숙소, 훈련장을 방문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들은 유공구단에서는 혼쾌히 허락해 주었습니다.위치는 인하대학교 근처의 유공 저유소 안에 있다고 미리 이야기 해 놔야 한다 했습니다.국가중요시설이라 경비가 쎄다고 했습니다. 석유저장시설이다보니 그렇더군요.서울의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옆에 있는 문화비축기지처럼 석유저장시설이기 때문에 당연한 거였습니다.지금처럼 길찾기 어플 같은 게 없던 때였기에 물어물어서 가야 했습니다.제물포 역에서 내려서 버스 몇번을 타고 가면 근처에 내려준다면서 거기서부터 찾아가라고 안내를 받았습니다.그대로 가니 넓은 6차선 도로를 가진 입구가 나오더군요.입구의 경비초소에 가서 신분증을 맡기고 ID카드를 받았습니다. 그 뒤 어디 가는지 행선지를 방명록에 적고 서명한 뒤에 들어가는 시간을 적었습니다. 나중에 나올 때에는 신분증 찾고 나가는 시간 적었고요."이 길 쭉 따라가신뒤에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가세요. 그 길 계속 따라가시면 축구장 보일거에요. 거기에 축구단 숙소 같이 있습니다."차없이 온지라 걸어걸어서 한 10여분을 걸어갔습니다. 연습구장이 나왔습니다. 안내받은대로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숙소에도 경비는 있었지만 미리 안내 받았다면서 아직 선수단 훈련 시간이 아니라고 알려주시더군요. 1층은 식당과 미팅룸이 있었고 2층이 숙소였습니다.숙소에는 가지 않았고 1층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니포 감독님이 오셨습니다!전 깜짝 놀라서 얼어붙어 있었는데 그분도 들어오시면서 깜짝 놀라시더라구요!마침 강창석 통역하고 같이 오셨는데 강창석 통역님도 깜짝 놀라셨습니다만 바로 말을 걸어주셨습니다.- 어서오세요~! 오신다고 이야기 들었어요."구단에 부탁했습니다. 허락해 주시더라구요. 선수들 훈련하는거 직접 보고 싶었습니다"- 훈련이 궁금하셨다고 들었어요"네. 어떻게 훈련했기에 그런 멋진 축구가 가능한지 정말 보고 싶었어요"이걸 감독님께 통역해 주셨습니다. 제 뜻을 들으신 감독님은 활짝 미소지으면서 뭐라뭐라 하셨습니다....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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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K리그 시즌은 새로운 규정이 적용되는 해였습니다.그건 '외국인 골키퍼 출전제한' 이 시작된 해입니다.동대문시절 일화의 마르셀(루마니아) 선수로 시작한 외국인 골키퍼는 2호인 사리체프(신의손)의 입단으로 큰 변화를 맞이합니다.사리체프는 입단하자마자 꼴지였던 일화를 K리그 3연패(요즘은 NBA의 감독 펫 라일리가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쓰리핏" 이라는 말을 쓰데요?)시키고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와 아프리카 챔스 우승팀까지의 경기를 승리하는 등. 꼴지팀을 갑자기 K리그 최고팀으로 바꿔놨습니다.이걸 본 다른 팀들도 수많은 외국인 골키퍼들을 들여왔습니다.유공도 모스크바 토르피도 팀에서 사리체프와 번갈아가며 골문을 지켰던 알렉세이 포드쉬발로프(등록명 : 사샤) 가 주전을 차지했고 심지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낸 선수까지 한국에 와서 K리그의 골문을 지켰습니다. 얼마나 이때 심각했냐면 K리그의 팀 중 단 한팀, 현대만이 한국인 골키퍼였고 모두 외국인 골키퍼가 주전자리를 차지한 상황이었습니다.그 한명이 김병지 입니다.이러다보니 지금 광주의 GK코치인 주용국 선수는 일화에 있는 동안 한경기도 못나가고 사리체프의 연속경기 출장의 그늘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은퇴 이야기까지...(결국 수원으로 이적했지만 경기기록은 없는걸로 압니다)이렇게 되면 한경기도 출전하지 못한 골키퍼가 국대를 지키는 일이 발생한다는 위기감이 나와 지금 연맹의 뜨거운 감자 중 하나인 [외국인 골키퍼 등록금지]가 생긴 해가 1996년이었습니다.그래서 아디다스컵에선 부천은 주전 골키퍼인 사샤(본명: 알렉세이 포드쉬발로프)가 나서지 않고 이용발 선수가 모든 경기에 주전으로 나섰습니다.이건 당시 있던 '외국인 골키퍼 선수는 시즌 경기의 2/3 경기만 출전 가능하다'는 것을 이용하려 한 것입니다.(1996은 2/3 출전가능, 1997은 1/2 출전가능, 1998은 1/3 출전가능. 사실상 1996년을 대비기간으로 주고 1997부터는 외국인 골키퍼 쓰지 말라는 거였죠)아디다스컵은 리그가 아니니까 성적이 좋지 않더라도 본게임인 리그에서는...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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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뉴스들을 흩어보니 전북현대가 전주월드컵 경기장에서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의 홈경기를 치루지 못한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https://youtu.be/xpSPI80aM6s흠...이거 업보일지도 모릅니다.1996년의 목동에서의 부천 홈 경기중에서 잔디가 얼어죽은 건이 실제 있었습니다.근데 이게 왜 전북현대의 업보냐면...이거 얼어죽은 건이 무려 5월에 생긴 일입니다.당시 2월 개막도 아니었고 3월 꽃샘추위도 아닌 여름으로 들어가기 직전인 5월에 잔디가...얼.어.죽.은. 겁니다.네 진짜입니다."근데 왜 전북이요?" 라고 하실텐데 이 이야기 풀어보겠습니다.1996년 이야기를 할 때 리그 전의 시즌 오프닝을 담당한 아디다스컵 이야기를 뛰어넘어 5월로 시간을 앞으로 돌려보죠.1996년 5월 어느날 구단 관계자분이 경기전에 저에게 하소연을 하셨습니다."원석씨 걱정되는게 있는데...현대자동차에서 운동회를 여기서 하겠대"...머리가 띵~ 해졌습니다.1995년 하이텔 축구동을 휩쓴 이슈 중 하나는 '경기장 잔디' 문제였습니다.KBS의 인기프로그램 '열린음악회'는 전국의 종합운동장을 휩쓸고 다니면서 잔디를 다 죽여버리고 다녔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얼마전 잼버리 때문에 생긴 상암경기장의 그 모습을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여러 경기장에 해대는 것이 국민방송 KBS였습니다. 아...대단한 KBS혹시 여기 1990년대 초반에 서울대 다니신 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님 지인에게 물어보셔요. 1990년대 초에 서울대 대운동장...무려 천연잔디 깔려있었습니다. 역시 대한민국 최고의 서울대였죠. 그러나 '열린음악회'는 가차없었습니다. '열린음악회' 한번 열린 뒤에 서울대 대운동장은 잔디 다 죽어버렸고 맨땅 되었습니다. 잼버리 땜에 망가진 상암경기장이요? 그거 서울대 대운동장이나 바로 뒤에 이야기할 울산의 건에 비하면 정말 잔디보호 잘한 겁니다.'에엥?' 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진짜입니다!울산의 이야기는 1994년 이야기입니다. 제가 '대한민국 프로축구 경기장 잔혹사' 중 거의 베스트1 으로 꼽을 정도의 일이었습니다.이때 울산종합운동장은 시즌 개막을 멋지게 하기 위해 겨울 내내 경기장 관리를 진짜...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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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제의를 받았을 때엔 손사래쳤습니다.아니 뒷방 늙은이가 뭐하러 나서야겠어...내가 2019 정규리그 막판 때 날뛰는거 함 했지만 그 이후엔 그렇게 응원하면 몸이 피곤해. 지금도 그렇게 글 쓰라면 너무 힘들고...거기다 나 다리수술 한 다음엔 걷는것도 힘들고 체력이 확확 떨어졌거든?그런 나이먹은 놈이 내가 잘났다고 나서는 것이 아니라 이젠 30대 40대들이 중심 잡아주고 난 도와주는거 정도 외엔 할게 있나?괜히 아유 저 꼰대가 왜 나서냐 소리 들을까봐 겁나네...라고 했더니만 "ㅇㅇ 그 도와주는게 바로 그런거 바로잡아주는거다. 오래전부터 붉은악마에서도 기억력 하면 너 아니었어?"라는 말엔 더 피해다닐 구실이 없었습니다.구단 처음에 만들 때 1995 관련 이야기를 한 이후 무려 15-16년만에 다시 제대로 글 써보자고 한 거였습니다.관련해서 이야기 들은 뒤에 일단 상황들 살피고 어떻게 쓸 것인지 고민하고 하나하나 구상을 해 나갔습니다.반박만 한다면 아주 쉬운 거였습니다. 여러분들이 환호해 주신 바로 그 구절만 딱 쓰면 끝이니까요.하지만 그것만은 아니었습니다.다시금 생각해 봤습니다. 특히 재작년에 건강 안좋아서 다리를 자를 뻔 했습니다. 아마 몇몇 분들은 제가 다리에 피 흘리면서 다니던 것 보셨을 겁니다. 작은 상처인데 이게 경기장 다니면서 세균감염되어 가지고 심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른발 복숭아뼈 아래를 모두 자를 뻔 했었어요. 그래서 시축때에도 공이 멀리 가지 못했답니다.지금 보니 응원석에서 라면먹는거 식겁한 글이 올라왔던데 이거 중요합니다. 경기장에서 다쳐서 잘못되면 큰일납니다. '잠깐이야 뭐' 하는 생각은 하지 말아주셨으면 해요. 다치면 안됩니다. 다 걱정되서 하는 말입니다. 저처럼 몸 하나가 불구되면 큰일납니다.여튼 이렇게 건강이...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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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명준K리그 초창기부터의 축구팬.동대문 3개홈팀 시절에 PC통신 하이텔 축구동이 시작한 유럽스타일의 서포터 응원방식에 호감을 가지고 계시다가 1996시즌 개막전부터 부천 응원에 리딩을 서 주셨습니다.초창기 붉은악마에서도 앞장서서 여러 일을 해 주신 대한민국 서포터계의 큰 형님중 한분.단언컨데 1996년 개막전에서 일반 관전을 포기하고 바로 서포터 리딩으로 활동해 주셨기 때문에 지금의 부천 서포터가 있을 수 있는 큰 일을 해 주신 분입니다.이분에 대한 이야기와 스토리가 딱 이번 개막전 직전에 맞춰 올리게 되었네요.-----------------------------------1996시즌 아디다스컵 개막전이었던 부산행은 작게 보자면 '아직 서포터라는 개념이 넓혀지기는 쉽지 않겠구나' 였고 크게 보자면 그날 경기의 '쇼케이스' 덕분에 몇개 서포터가 생겨나는 계기가 된 부분에선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전날부터 고생해서 왔던 저를 위해 박철효 형님은 야간열차 침대칸을 잡아주셨습니다.현재 코레일은 야간열차를 운행하지 않기 때문에 그때 탄 통일호(이것도 지금은 사라졌죠) 야간열차는 제가 한국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탄 침대차였습니다. 그 덕분에 올라올 땐 편하게 올라왔습니다.올라오면서도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수원 응원을 표방한 분들은 다시 오지 않을거 같았고 목동은 처음 가보는 경기장이었습니다.1988년 올림픽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 외엔 몰랐습니다.목동 운동장은 잠실 주경기장의 보조경기장이 아닌 예비 경기장으로 계획되었습니다. 착공은 1987년 개장은 1989년이기에 뭔소리냐 하시는 분 계시겠지만 올림픽은 주경기장 외에도 예비경기장이 있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습니다. 즉 1988년 1/4분기에 천재지변급의 일이 주경기장에 터진다면 예비 경기장에서 치뤄야 하는 것이죠. 때문에 1987년에 착공되어 만들어져 놓고 1988년 여름 이후 천천히 마무리지어 1989년 11월에 개장하게 되었죠. 그래서 목동운동장의 주차장은 체육관이 건설될 자리로...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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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목동 경기장에서 열린 아디다스컵 개막전 전에 다른곳 개막경기 하나는 꼭 이야기 해야하기에 글의 시점을 일주일 정도 전으로 옮기겠습니다.아니 정확히는 20일 가깝게 더 전으로 개막전 들어가기 전으로 가야겠군요.1996년 아디다스컵을 1-2주 정도 앞두고 부산에 거주하는 수원서포터 한분이(누구인지 현 상황에서 이름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익명으로 처리하는거 때문에 거짓이라 하는 분이 계실겁니다만, 그분에겐 아쉽게도 실화입니다) 축구동 게시판에 도움을 요청하는 글을 올리셨습니다.부산구단쪽과 이야기해 본 결과 "서포터 응원방식을 아디다스컵 개막전에서 보여달라"는 것이었습니다.이게 뭔 말이지?이때는 IMF 이전이기 때문에 이 오더는 아무리 봐도 김우중 회장이 내린거 같았습니다.설명을 좀 하자면 당시 대우 축구팀은 다른 팀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지금은 K리그1, K리그2 에 참가하는 구단은 [독립채산재]라고 해서 별도의 법인으로 운영해야 합니다만, 이때만 해도 기업 구단은 모기업의 조직표에서 어디에 위치한 '부서'였습니다. 대부분은 '홍보팀'에 속해 있었습니다.당시 유공팀도 유공의 홈보팀에 있는 '축구팀' 부서였던 거죠.대우는 예외였습니다. 그렇다면 대우 축구팀은 그룹내의 어느 부서 소속일까요?비서실 산하에 따로 독립부서로 있었습니다. 김우중 회장이 손수 챙겨다닌 부서였습니다.괜히 김우중이라는 분이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축구성덕' 소리 듣는게 아닙니다. 그의 경제계에서의 과는 제쳐두고라도 '김우중' 이라는 분은 축구와 바둑이라는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에 있어선 크나큰 업적을 남긴 사람입니다.김우중 본인은 현실 FM 해 버린 사람입니다.대한민국 프로스포츠 역사상 최초로 흑자구단 만든게 대우 축구단이기도 합니다.깜짝 놀라신 분도 계실 겁니다. 아니 대한민국 프로스포츠에서 흑자가 가능하다고요? 구라치지 마세요 라고 하실 분들도 계시겠죠. "기업 광고효과로 흑자효과 난거 아니냐"라고 하실수도 있지요.그런데 실제 회계상으로...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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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이 되었습니다.신년이 지난 뒤 얼마 뒤에 전화를 받았습니다."원석아 우리 수원삼성 응원하는게 맞는거 같다. 유공 응원은 이제 하지 말고 수원 응원으로 가자"???????이게 뭔 말이지?-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세요?"송년회때 리호승 대리하고 이야기를 깊게 했는데 수원삼성쪽이 유공보다는 지원이나 계획이 잘 잡혀있더라. 솔직히 1년동안 유공이 우리를 위해 얼마나 해 준게 있냐?"- 그 부분은 제가 주도적으로 한건 아니고 참가만 몇번 한거다보니 잘 몰라요"그런 부분이 있어. 유공은 우리를 알바 이상으로 생각 안하는거야. 제대로 축구응원 하려면 수원삼성으로 가는게 맞다. 너도 와라"- 잘 모르겠습니다. 고민좀 해야겠네요.대략 이런 정도의 이야기를 하며 끝냈습니다.머리가 혼란스러웠어요. 대화내용대로 그리고 앞에 쓴 글 내용대로 전 하이텔 축구동에서 유공 응원으로 나서서 얼마나 지원을 받았는지 등은 잘 몰랐습니다. 경기 끝나고 응원도구 정리하는 것도 시즌 막판에나 봤거든요. 스탠드 밑의 빈 방을 응원도구 보관용으로 내 줘서 거기에 응원도구 보관하는 걸 1995 시즌 마지막 경기 때 응원도구 정리하는거 도와주면서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나중에 목동 쓸 때에도 비슷한 위치(스탠드 밑)의 방을 하나 응원도구 보관하는 것으로 사용 가능하게 해 줬습니다. 1998년 이후에는 다른데로 옮겨졌습니다. 옮겨진 곳은 목동에서부터 응원하신 헤르메스 분들은 알고 계시는 그 위치입니다.)그 뒤로 별다른 연락은 없었습니다.칸타타에서 했던 송년회에서 이분들이 리호승 대리하고 계속 이야기를 하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때 이야기가 나온건가 싶었습니다.--------------------3월초에 대학로 근처의 '대여 카페'에서 모임이 있었습니다.수원삼성 팀에서 쓸 응원도구 등에 대한 것과 이번 시즌 응원에 대한 수원삼성 구단의 약간의...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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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6일 칸타타에 출근하자마자 송년회 준비 들어갔습니다. 테이블도 재배치하고 음료수도 새로 쌓아놓고 등등...일이 계속 있었습니다. 슬슬 한두분씩 와 주셨습니다.당시는 주6일 근무였던 때라 오전에 근무하고 수업듣고 오후에 오시기 시작한거죠.[칸타타가 있던 건물. 우정타워. 현재는 KUIC한국대학정보센터 가 들어와 있습니다.]유공축구단에서 저희의 업무를 맡아봐 주시던 김시문 대리님께도 연락을 보냈습니다.김시문 대리님은 혼쾌히 참석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계원 단장님은 아쉽게도 오지 못했습니다.그리고 또 다른 구단 직원이 참석하셨습니다. 1995년 가을쯤 '프로구단 창단'을 발표한 수원삼성축구단에서 리호승대리님이 오셨습니다.그래서 오기환, 이매리 두분은 식순에 구단 직원분들의 인사말 관련을 넣었습니다.김시문 대리님은 젊은분들이 이렇게 축구장에 와서 보여준 모습에 감사를 표했습니다. 내년엔 목동에서 하는 것 때문에 많은 준비를 하고는 있지만 교통 등에서 고민중이라고 이야기는 했고 언제든지 좋은 의견 있음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부천에서 오는 분들을 위해 부천역에서 출발하는 셔틀버스도 작지만 운영해 볼 생각이라고 이때 밝히셨습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는 이 셔틀버스를 타고 부천에서 목동으로 한번쯤 오신 분이 계시지 않을까 싶네요.삼성축구단의 리호승 대리님도 인사를 하셨습니다.초대 단장인 윤성규 단장님 이야기도 하시면서 일하는게 어떤 부분은 참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윤성규 단장님은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재독 교포셨습니다. 독일에서 오래 사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한국 상황과 달리 독일식으로 운영하려 하신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여담입니다만 제가 2000년에 대한민국 올림픽 대표팀이 네덜란드 아른햄 인근에 캠프를 차렸을 때와 2001년에 대한민국 월드컵 대표팀이 네덜란드에 캠프 차렸을 때 캠프 방문을 했던 적이 있는데 제가 간 날에 딱 마주쳐서 깜짝 놀랐던 적이...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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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들어온게 있어 1995 시즌 이야기를 더 하게 되었습니다. 하이텔 축구동의 유공구단 응원이 몇달지나지 않아서 여름철이 되었습니다.여름철이 되자 응원단의 일선에서 뛰던 몇몇분들이 "동대문에서만 응원하지 말고 지방에도 가 보고 싶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실행을 한 것입니다. 당시 수도권 팀 외에 구단이라면 포항/울산/부산/광양/전라북도 를 갈 수 있었습니다.이렇게 표현하는 이유가 당시 전북 구단은 현재와 달랐습니다. 전북이라 불리긴 했지만 홈 경기장에 지금 전주월드컵 경기장이 아니다보니 전북의 몇몇 곳을 다녔습니다. 실제로 제가 1996년 아디다스컵 부천vs전북의 경기를 보러 간 곳은 이리공설운동장입니다. 이리는 지금의 익산입니다. 뭐 전주 부근이라면 전주 부근이지만요. 이분들이 가고 싶어했던 곳은 포항이었습니다.당시 포항은 하이텔 축구동 회원들에게 있어서는 '꿈의 구장' 이었거든요. 개장된지 5년밖에 안된 새삥이기도 했고 종합운동장이 아닌 축구전용구장의 그 맛. 여러분들도 아시잖습니까? 근데 그 당시는 광양과 포항 딱 둘만 있던 때입니다. 그리고 광양보다는 포항! 이었지요. 그 이유는 당시 광양은 조명탑이 없던 때입니다. 놀라실것 같지만 광양에 조명탑이 설치된 것은 개장 이후 좀 되서였습니다. 그래서 여름철 야간경기를 보려면 역시 포항이었지요! 그래서 여름철에 유공 경기를 따라가는 것 외에도 주말경기때에 시간이 맞으면 응원가는 분들이 계시게 됩니다. 이때부터 '서포터의 원정응원'이 부천응원단을 통해 시작된 것입니다.당시 응원을 주도하고 참가를 많이 (몇분은 개근하셨죠) 한 분들의 대부분이 수원 서포터로 1995년 말에 이동하셨습니다만 이 때는 부천서포터로 활동했습니다. 당시 서포터라는 말은 박철효님의 제안으로 쓰이기 시작했기에 응원단과 서포터라는 용어가 혼재해서 쓰이던 때였습니다.정확히 말하면 서포터는 PC통신 내에서는 서포터로 통일해서 쓰였지만 언론보도에선 스포츠 서울 외에는 '응원단'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지상파...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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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시즌이 끝났지만 아직 이야기가 더 끝나지 않았습니다.시즌이 끝나자 연고이전에 대한 언론 보도가 나왔습니다. 당시 서울은 일화, LG, 유공 이 세팀의 공동연고지였습니다.서울을 연고지에서 빼고 일본 J리그처럼 '공동연고지'로 하자는 이야기가 나온 거죠.김현회 기자가 논쟁을 일으켰으니 결국은 취재 부족을 드러낸 바도 있었던 사안인 '수도권 공동화정책' 이 이때 일입니다. 1994년부터 이 이야기가 나온 것으로 알고 1996년에는 동대문 운동장에서 방을 다 빼야 하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1995년 말에 연고지를 새로 정해야 했는데 유공은 부천으로 연고지를 정했죠. LG는 안양으로 정했고 일화는 천안으로 정했습니다. 이걸 놓고 '유공이 꼼수 부렸네' 라는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당시 부천은 관중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스타디움'이 없었습니다. 부천시민회관 옆에 있는 '시민운동장'이 다였습니다. 그때 '공설운동장'이라고 불렀을 겁니다. 지금은 잔디밭이지만 그땐 맨땅이었고 콘크리트로 한면만 좌석 올라갔던 때입니다.그걸 어떻게 아냐면 당시 부천으로 축구팀이 오자 부천 토박이 내지는 오래 사신 분들 중 조기축구회 등에서 활동하신 분들이 대환영 하셨고 이분들 중 일부가 PC통신에 가입하셔서 축구동 활동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당시 열심히 활동하시던 분 중에 ID를 AG909로 쓰시던 송관성 형님이 생각나네요.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모르겠습니다.그래서 초대받아서 방문해서 부천의 여러 조기축구회의 어르신들과 이야기도 하고 하다보니 알게 된 사정이었지요.  여튼 '부천에 경기장 짓기 전까지는 서울 목동 구장을 사용한다' 는 방침이 나오자 "어떻게든 서울에서 경기 하기 위해 꼼수 부린거다" "아 그래서 다른 두개 구단보다 먼저 발표한거구나...선빵 날렸네" 라는 의견들이 많았습니다. 글이 길어지겠지만 '서울 연고지 제외'관련은 이야기를 좀 해봐야겠습니다.김현회 기자가 '수도권 공동화정책'이라는 표현으로 기사를...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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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들어와서 하이텔 축구동이 커졌냐...면 그건 아닙니다. 당시 PC통신은 지금의 인터넷과 완전 달랐어요. PC통신 없으면 살아가는데 힘든 상황이 아닌 시대죠. 정말 하고싶은 사람만 하는 거였습니다. 이전 글에 말했지만 전화회선 사용해서 하던지라 전화비가 많이 들었습니다. ISDN 서비스를 신청해서 할수도 있었지만 이건 이 서비스 아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었고 14400bps라는 느린 속도도 제대로 안나오는 거라서 참 애매했던 시절이었지요. 그러다보니 동호회는 그리 커지지 않았습니다. 1995년 3월경으로 기억합니다. 하이텔 축구동에서 온라인 활동은 그리 많지 않았지만 앞에 말한 축구팀에서 활동하던 박중현 형이 채팅으로 저보고 만나자고 했습니다. 이때 보통 만나는 장소는 동대문운동장에서 많이 만났어요. 어디 번화가나 카페거리 보다는 동대문이 서로 만나기 편했으니까요. 대화의 내용은 대강 정리하자면 이랬습니다. ------------------------------- "원석아 우리 축구팀 하나 응원하는게 어때?"중현형의 그 말에 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 아니 우리가 독립적이고 어디 소속된 것도 아닌데 어느 한팀 응원을 하자고요? "서양애들 응원하는거 봐봐 우리도 그렇게 함 해보고 싶지 않냐?"- 그렇긴 한데 그게 지금 될까요? 몇명이나 호응할까... "함 해보자. 지금 생각은 유공팀 접촉해 보려고 하고 있어"- 잉? 거기 비인기팀인데...구단 운영도 별루 아녀요? "그러니까 접촉해보자는 거지. 일화는 박종환 팬들이 많잖아. 그리고 LG는 서울 말고도 다른데서 경기 많이 하니까... 그리고 유공은 비인기팀이니까 응원한다고 가면 우리 도와줄 가능성이 높아"- 아...전 모르겠습니다. 일단 전 여기에서는 빠지겠습니다. 형님이 접촉해서 진행하신 뒤에 알려주세요. (이 대화에서 "유공이 우릴 도와줄 가능성"을 언급했다는 것은, 최근 이야기 되는 서포터 역사 이야기에서 '구단의 지원을 받았으니 서포터가...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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