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역사
이 페이지는 부천FC 1995가 프로 진입에 성공할 때까지 어떠한 과정을 거쳐 왔는 지를 적어 놓은 공간입니다. 우리의 자부심이며 부천 팬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소중한 우리의 역사를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이야기를 이곳에 담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주요 사건 위주로만 적어둘 수밖에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
95-00
현재 준비 중입니다
2001

부천종합운동장 개장
부천에서의 첫 해이자, 부천 종합운동장이 개장한 역사적인 해. 출발은 순탄치 않았다. 리그 시작 전 컵 대회에서 5연패로 최하위. 리그에서도 7위라는 좋지 못한 성적. 서포터즈가 승리를 기원하는 고사를 경기장에서 진행할 정도로 좋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컵 대회 평균 관중 27,003명 , 리그 평균 관중 19,471명이라는 놀라운 수치를 기록했다.
헤르메스는 목동으로 떠나 부천 입성에 맞추어 체제를 정비했다. 정비 과정에서 J리그의 서포터 대표들과 만남을 가지면서 아이디어를 교환했다. 당시 교류는 J리그 서포터들의 연락으로 이뤄지게 됐다. 서포터 소모임의 자율성 강화, 자신이 응원하는 축구 구단과 서포터즈 클럽에 대한 배타적 자부심 강화, 서포터 핵심 집단의 헌신. 지역사회 및 일반 관중과 조화 등의 서포터 문화를 수립했다.
하지만
주축 선수의 계약 문제, 설이 난무했던 감독 퇴진 등 모기업의 구단 운영에 의문을 품은 서포터들의 항의 시위가 있었다. 98년 말에 부임한 새 단장 취임 이후 서서히 시작 된 부천의 추락은 부천 입성과 함께 그 속도를 높이게 된다.
02-03



내다 버린 월드컵 특수
2002년 월드컵 특수에 힘입어 평균 관중 32,235명 그리고 8월 11일에는 38,833명이라는 부천 역대 최대 관중을 기록한다.
월드컵 이전에는 01년 J리그 서포터 대표들과의 만남을 인연으로 시작하여 우라와 보이즈와 대표자 만남을 한국과 일본에서 가졌다. 당시 K리그와 J리그의 응원을 주도했던 서포터들간의 교류였다. 이 과정에서 과거에 공유했던 문화에 대한 내용을 다시 확인하였다. K리그 서포터 문화에도 변화가 있었다. 서포터가 자신이 지지하는 팀에만 집중하는 문화가 보편화되면서, 헤르메스와 국내외 서포터들과 각종 교류는 대부분 사라졌다. 심지어 월드컵 이후 헤르메스는 붉은악마에서도 탈퇴하고 지역모임과 일부 소모임만 붉은악마에 남게 되었다.
월드컵 직후 구단의 유니폼 후원사 푸마의 후원을 받아 제작한 유니폼 통천을 국내 최초로 사용하게 된다. 이 유니폼 통천으로 N석 전체를 덮은 사진은 헤르메스를 대표하는 사진으로 널리 알려졌다. 월드컵 특수로 늘어난 관중와 함께 대형 깃발, 홍염, 게이트 깃발을 총 동원하여 당시 타 서포터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여러 가지 대형 퍼포먼스를 보여주게 된다.
문제는 계속된 파행적 구단 운영이었다. 월드컵 직후 이을용 이적 , 최윤겸 감독 경질 후 터키 출신 트나즈 감독 임명 등 어수선한 분위기로 시즌을 보내게 된다. 서포터들의 강력한 항의와 반대 시위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2002년 8월 31일에는 구단과 서포터 대표의 면담이 있었다. 당시 격양 된 팬들의 분위기를 진정시키려는 것이 목적이었을까? 이 자리에서 SK는 지켜지지 않을 200억 투자 약속을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성적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고 트나즈 감독이 취임한 이후에는 평균 관중이 5,653명까지 감소한다.

![jys2003_272355_1[416778]](https://bucheonfc.net/wp-content/uploads/2025/02/jys2003_272355_1416778.webp)
최악의 암흑기 , 헤르메스 해체
2003년에는 팀의 간판이였던 이임생, 곽경근이 부산으로 이적하고, 김기동까지 포항으로 이적한다. 이로써 니포 축구의 주요 멤버들은 이원식, 남기일, 윤정춘을 제외 하고 모두 팀을 떠난다.
SK는 200억을 투자에서 90억 투자로 말을 바꾸었으며 구단의 거짓말에 지친 부천 서포터는 이에 대한 항의로 개막전 응원 보이콧을 결정한다.
5월에는 트나즈 감독이 해임되고 하재훈 감독대행이 임명 되는 등 매년 감독이 바뀌는 상황에 성적 또한 곤두박질 치기 시작했다. 22경기 연속 무승이라는 K리그 타이 기록을(03년 당시) 세우기도 했으며 시즌 역시 꼴지로 마무리하게 된다. 평균 관중은 5,577명 특히 2003년 10월 31일 구단 매각 결정 발표가 있은 이후에는 관중이 1천명대로 추락한다.
팀은 나락으로 갔지만 부천 서포터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여러 방식으로 발전을 강구하게 되는데 운영 체제의 변화였다. 2003년 8월 31일 기존 조직 체계를 뒤로하고 ‘독립 서포터’ 체제를 시작하게 된다. 쉽게 말해 ‘헤르메스’ 라는 중앙 집권적 리딩 방식에서 벗어나 소모임들의 각각 서포터 집단이 되어 누군가 선창을 하면 서서히 응원이 시작되었다가 자연스럽게 응원이 종료되는 방식의 축구 선진국형 서포팅을 실험하게 된다. 결과가 성공이든 실패든 항상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도전했던 것이 부천 서포터였다.

당시 구단들은 FA컵 보다 리그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덕분에 FA컵은 하위권 팀들의 주무대가 되곤하는데 리그 최하위 부천도 FA컵에서 준결승까지 진출하였다. 상암월드컵 경기장 열린 이 경기에서는 꼴지팀 서포터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응원을 선보인다. 하지만 심판의 경기 운영에 불만을 품은 서포터들이 경기 후에 경기장에 난입하는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3년 12월 인천 유나이티드의 창단이 발표된다. 이 때 많은 수의 인천 출신 부천 서포터들의 팬고이전이 이루어 지게 되는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철새’ 는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팀을 바꾸는 것은 나라를 바꾸는 것과 같다며 인천에 거주하던 부천 서포터들이 배신자 철새들과의 인연을 끊기도 했다.
04-05

출처 : 네이버 블로그 인천 계양산도사
재기의 시간
하재훈 감독 대행 이후 2002년 월드컵 대표팀의 코치 경험이 있던 정해성 감독이 부임한다. 이원식(안양)과 남기일(전남)의 이적으로 기대치가 꽤 많이 낮아진 04시즌이었다.
독립 서포터 시행 이후 의견이 맞지 않아 서포터 내부적으로도 분리 되는 모습도 있었다. 게다가 전체적으로 미래가 안 보이는 구단 운영 그리고 타 구단으로 옮겨간 사람들로 인해 규모도 작아지던 시즌이었다. 골수팬들만 남아 경기장을 지키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리고 2004년 후기리그 당시 평균 관중은 1,405명까지 떨어져 있었다.

04년 부천은 또 다시 최하위를 기록하고 만다. 하지만 03년과 달라진 점이라고 한다면 득점력 부재로 인한 승리가 적었을 뿐 실점 자체는 상위권 팀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적었다. 쉽게 지는 팀에서 벗어났다는 것 그리고 FA컵 결승 진출이라는 결과가 다음 시즌의 기대감을 가지게 해준 한 해였다. 서포터도 기대감 속에 재결집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세우게 된다.
참고로 FA컵은 12월 25일 창원에서 열렸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친구, 연인과 함께 원정에 참여한 서포터도 있었지만 많은 서포터들이 연인과의 약속을 깨고 원정에 참여하였다가 헤어지기도 했다. 그만큼 부천 서포터들은 부천에 대한 충성심과 열정이 대단했다. 안타깝게도 이 경기는 승부차기 끝에 준우승에 머무르게 되었다.
FA컵 준우승 후 12월 27일 송년의 밤 행사에서 구단 고위 인사가 “축구단 해체”, “원정 경기에서는 패해야” 등 망언을 내뱉고 만다.

시즌을 치르면서 점점 늘어나는 관중
재결집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이루기 위해 뜻이 맞는 각 모임의 주요 인물들과 기존 소모임이었던 유니티1997, 울트라스 부천, 단심 등의 회원들이 함께 레드 핫 페퍼스라는 이름으로 2005년 새 시즌을 준비하게 된다. 참여하지 않은 소모임은 독립성을 유지했다.
정해성 감독이 이끌던 당시 부천SK는 무명, 신인, 노장 선수들 위주로 팀이 꾸려졌지만 튼튼한 조직력과 체력을 앞세워서 모든 팀을 압도하는 축구를 펼치게 된다. 24경기 18실점이라는 놀라운 수비력으로 전기리그 7위 후기리그 2위 심지어 2군리그 우승이라는 놀라운 변화를 보여준다.
부천 서포터의 규모는 예전에 비해 작아졌지만 재결집에 성공하면서 부천의 자랑인 깃발과 목소리를 앞세워 죽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부천 서포터는 다른 서포터에 비해 남성이 많아서 거친 면이 있었고, 목소리가 큰 것으로 유명했지만, 05년의 부천 서포터는 암흑기를 거치고 남은 자들의 악에 바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시즌이기도 했다.
아래는 당시 축구 커뮤니티였던 사커월드에서 부천 서포터를 본 타팬들의 댓글들이다. (클릭하면 볼 수 있습니다)

당시 부천에서는 특이한 광경을 볼 수가 있었는데 매경기 후에 감독이 서포터 앞까지 뛰어와 주었다. 단순히 인사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 경기에 대한 다짐을 팬들에게 전달하곤 하였는데 여기에 그치지 않고 실제 결과로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팬들 역시 부천이란 팀에 대한 신뢰, 기대 그리고 자부심을 가지고 경기장을 찾게 되었고 2005년 컵대회 평균관중 1,850명에 그쳤던 부천은 전기리그 2,058명 후기리그 4,803명으로 다시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게 된다.
부천은 원래부터 관중이 없던 것이 아니라 구단의 막장 운영으로 관중을 내쫓아서 없었던 것이다. 한 번 떠나간 관중은 경기장에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관중을 다시 불러 들이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요구가 된다. 부천 팬들이 타 팀 팬들 보다 더 구단 운영에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는 이유는 이를 경험했었고 또 잘 알기 때문이다.
2006-1

SK의 야반도주
2005년 시즌에는 플레이오프 진출은 못했지만 날로 좋아지는 팀의 모습에 부천 팬들은 새로운 시즌에 대한 기대감에 차있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주 전력이었던 고기구, 김한윤을 타구단에 팔아버리는 SK의 선수 팔기가 계속 이루어지는 바람에 1월달 서포터 홈페이지가 한 때 난리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후에 더 큰 것이 올 줄은 아무도 예상 못했다.
2006년 2월 2일 제주로 연고 이전 발표
평소와 다름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던 부천팬들은 날벼락을 맞는다. 심지어 전날에는 구단 관계자와 서포터가 만나 “올 시즌 잘 해보자”는 대화를 나눴고, 당일에는 서포터 홈페이지 리뉴얼을 위해 업체 방문 약속을 잡고 있을 정도로 그 어느 누구도 이를 예상하지 못했다.
연고 이전과 더불어 이전지가 제주라는 것도 충격이었다. 제주의 지자체 또는 일부 단체가 국내 구단 하나를 제주도로 이전 시키려 한다는 소문을 접한 사람도 있었지만 SK가 굳이 욕까지 먹으면서 제주로 갈 리가 없다며 웃어 넘겼으니 말이다. 당시 제주는 월드컵 경기장 소유한 도시 중에 유일하게 프로 구단이 없는 도시였다. 하지만 경기장 위치가 제주시가 아닌 서귀포시에 있다는 점에서 관중 동원, 교통 문제 등 프로 구단 운영이 쉽지 않은 조건이라는 평이 있었다. 지금 역시 평균 관중은 6천명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으며 제일 성적이 좋았던 2017년 시즌에도 평균 관중은 4,057명에 그쳤다.

급작스런 연고이전 발표 소식에 부천팬들의 충격은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충격이 너무 큰 나머지 한동안은 멍해있던 팬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허망한 심정에 부천팬들은 당일 저녁 6시 30분에 서포터 사무실에 모이게 된다. 서포터 측면에서 특별한 대응 등을 이야기 하려고 모인 것은 아니었다. 각자가 느끼는 상실감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가족, 친구가 아닌 부천팬 동료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같이 모여서라도 있으면 위안이 되거나 혹은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란 희망에 모였다라는 것이 맞을 것이다. 모임에는 특별한 이야기가 오갔다기 보다는 여기 저기에서 들리는 한숨 그리고 담배 연기만 모락모락 오르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다. 중간에 원로 서포터 중 한 분이셨던 분이 찾아와 ‘이미 끝났다’ 라는 냉정한 말을 전하고 가시기도 했다.


마치 교통사고가 나면 그 다음날부터 통증이 올라오는듯 하루가 지나자 아픔과 분노에 가득찬 글들이 부천 서포터 게시판에 도배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대로 분노만 표출하고 있을 부천팬들이 아니었다. 곧 바로 부천시청 ‘시장에게 바란다’ , 각종 커뮤니티, 언론 제보 등의 행동에 바로 돌입했다.
2월 8일 비상대책위원회 기자 회견
2월 10일 부천 시장 홍건표 면담, 부천서포터 발표문 게시
2월 14일 프로축구연맹시위, SK본사 시위
2월 19일 손학규 경기도지사, 김문수 국회의원 면담
2월 21일 연합뉴스, sbs 인터뷰, 오마이뉴스 인터뷰
3월 01일 앙골라전 시위
3월 중 부천 시의원 미팅
연고이전 발표 후 부천팬들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K리그와 내셔널리그 서포터까지 포함 된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붉은악마도 연고이전 반대 운동에 동참하였다. 이러한 공조는 부천 서포터들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긴하나 2년만에 또 일어난 연고이전 사태에 대해 국내 팬들이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 컸다. 실제로 당시 1~2개 구단의 연고 이전설이 파다했다. 즉,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언젠가 자기들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라는 위기감에 연합을 이루는 것이 가능했다.
* 2025년 제주SK와의 경기에서 SK 안티 응원가를 부른 부천 서포터에 대해 응원가 소유권(?)을 제기하는 일부 타서포터가 있었다. 이 응원가는 부천 서포터가 처음 부른 것도 아니고 부천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앙골라전 시위 당시 연고이전에 대한 위기 의식을 느낀 모든 팬들의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불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국내 서포터의 일부 응원가가 붉은악마 응원에 차용되었듯이 연고이전 이슈에 대해 만들어진 연합 응원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당시 부천 서포터 대표가 작성한 발표문의 마지막에는 이러한 문구가 있다.
“한국 최초의 서포터인 부천 서포터는 다시 한국 최고의 축구리그인 K리그에서 응원하게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부천팬들은 본격적으로 K리그로 돌아가기 위한 팀 창단을 위한 작업에 돌입하게 된다.
2006-2

창단을 위한 움직임
SK에 대한 항의 및 연고이전의 부당성을 알리는 것과 동시에 팀 창단을 위한 움직임도 활발했다. 창단 대행 업체를 선정하여 보다 전문적으로 기업과 지자체 협조를 끌어내어 팀을 창단하는 방식을 택했다. 곧바로 대행 업체를 선정하고, 여름에는 분데스리가 리그 사무국 간부의 방한을 통해 분데스리가의 노하우와 정보 등을 제공 받기로 약속하기도 한다. 부천시의 소극적인 태도, 후원 기업 부재 등으로 순조롭게 진행은 되지 못했지만 팀창단 운동의지와 활동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관심을 모으는 효과가 있었다.
5월 16일 에콰도르전 시위(상암)
5월 21일 2002 부천 축구클럽 창단 및 운영업체 선정
6월 13일 남아공 월드컵 토고전 걸개
6월 18일 남아공 월드컵 프랑스전 걸개
6월 23일 남아공 월드컵 스위스전 걸개
8월 5일 분데스리가 국제팀장과 부천 서포터와의 창단 간담회
8월 20일 K리그 올스타전 참가
그 밖에 SK 수도권, 충청 경기 중 항의 시위
대행 업체를 선정했지만 일을 맡겨 놓고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다. 부천 서포터들의 팀 창단을 위한 움직임은 국가대표 경기 및 각종 모든 축구 행사에서 ‘BUCHEON’ 이란 문구를 볼 수 있을 정도로 활발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대한민국 축구와 관계 된 곳이라면 누구든 간에 부천 걸개를 들고 갔다. 그리고 이 모든 활동들이 추후 부천시내 인사들의 여론을 움직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시의원, 국회의원, 부천시축구협회 등 부천 시내 인사 및 단체들과의 미팅도 끊임 없이 이어졌다. 내 팀을 다시 만들겠다는 일념 하나로 학업, 직장을 포기하면서까지 움직이고 움직였던 부천팬들이었다.
여담
* 2006년말 할렐루야가 연고지 이전 한다는 소문에 부천으로 올까봐 조마조마했던 일이 있었다.
* 모 서포터가 8월 중에 부천 서포터 대표를 사칭하다가 잡혀 사과문을 쓴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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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잇단 창단 시도 실패의 시련에도 멈출 수 없었다
창단 시도가 지지부진 해지자 대행 업체와의 계약이 종료된다. 이후 모 축구 해설위원을 팀장으로 TF를 결성했다. 하지만 해당 위원의 개인 사정으로 인하여 도중 하차하게 되며 이마저도 흐지부지 된다. 창단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편, 대한축구협회는 리그를 단계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K리그 , 내셔널리그에 이은 K3리그를 새롭게 구축하게 된다. 현재 내셔널리그는 사라지고 K3, K4가 세미프로리그로 이를 대체하고 있지만 당시 K3리그는 아마추어리그였다. 단, 일반인들이 아닌 등록 선수들이 뛰는 리그로 낮에는 본업, 저녁에는 훈련 그리고 주말에 경기를 갖는 방식이 주가 되었다. 2007년에는 시범리그로 운영이 되었으며 총 10개팀이 참가하였다.
창단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TF에게 K3리그 창설은 가뭄에 단비와 같은 소식이었다. 무엇보다 팀 운영을 위한 예산 1~2억원 정도 확보 후 일단 팀을 출범할 수 있고, 소액의 자본으로 어느 정도의 틀이 갖춰진 리그에 참여한다는 매력이 있었다. 문제는 내셔널 리그에서 K3로 목표를 낮추어도 부천팬들이 납득을 하겠느냐였다. 다행히 이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부분 우리의 팀만 생긴다면 리그의 수준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본격적으로 부천 서포터로 구성된 창단 TF가 중심이 되어 창단 작업이 진행되게 된다. 시민 모임의 고문이었던 배기선 의원 중심으로 미팅을 이어나갔다.
제일 먼저 스포츠토토와의 후원 약정이 있었고 SK에너지, 다음 커뮤니케이션과의 대화도 이어졌다. 본격적인 팀 창단에 있어서 필요한 자금은 팬들의 십시일반 기부와 노동으로 채워졌다. 덕분에 조금씩 팀 창단을 위한 기틀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팀명은 부천FC1995, 팀 컬러는 기존의 빨간색을 유지하기로 한다. 초대 감독으로 곽창규 부명정보고 감독이 선임이 되었으며 공개 테스트와 유력 아마추어 팀 출신 선수 등으로 선수단을 구성하였다.
어려움도 적지 않았다. 축구단이 생긴다는 소식에 구단 창단 TF를 접수하여 구단을 자신들의 소유로 하려는 세력이 나타나기도 했고, 운동장 사용 문제도 있었다. 부천시와 연고지 협약은 부천FC의 대표성에 대한 문제제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다가 간신히 11월 1일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자금 문제 였다. 팀은 어느 정도 갖추었지만 후원금이 들어오기까지는 자비로 운영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각 서포터들이 돈을 각출하여 운영에 보태는 일도 있었다.
대망의 12월 1일 14시 30분 부천시청 대강당에서 부천FC 1995 창단식이 열리게 됨과 동시에 부천 서포터도 기존 부천서포터연합에서 ‘헤르메스’로 다시 바뀌게 된다.
* SK에너지 스폰 문제
– SK 에너지의 스폰을 받은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자들이 있다. 하지만 SK에너지로 부터 받은 돈은 어떠한 대가도 없는 ‘무조건’ 스폰이었으며 팬을 버리고 간 것에 대한 배상금으로의 성격이 강했다. 오히려 부천쪽에서 SK에게 당당하게 요구했던 돈이었다. 또한, SK마크를 유니폼 어깨에 채택을 한 것은 스폰서에 대한 부천 구단의 태도를 보여주기 위한 최소한의 배려 중 하나였다.
만약 이것이 문제가 된다면 우리나라 축구팀을 운영하고 있는 대기업 대부분이 과거 대일본청구권을 시작으로 일본의 기술과 자본과 함께했던 것부터 부정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 TNT 선수단 흡수 논란
–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TNT팀은 그대로 남아 FA컵 및 풋살 대회에도 참가하였고 지금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완전히 팀을 없애버린 흡수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2008





팬들이 함께 하는 구단 운영
본래 구단 운영은 대행사에 맡기고 팬들은 자신들의 위치로 돌아가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잇따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팬들이 스스로 팀을 만들게 됨에 따라 모든 운영도 자연스럽게 팬에 의해 이루어 지게 된다. 따라서 이 시기부터는 구단의 역사와 서포터의 역사가 동기화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어렵게 만들어낸 우리들의 구단을 지속시켜 나가 위해서는 확보한 예산을 최대한 아껴서 운영해야했다. TF 뿐만 아니라 부천 팬, 선수 및 코칭 스태프 모두가 한 마음이었다. 아래는 우리 구단을 위해 팬들이 해 온 일들 중에 대표적인 활동만 일부 소개한다.
– 상주 직원은 부천팬 출신 단 한 명이 전부였고 모든 업무는 TF가 수시로 사무실과 외부 그리고 온라인을 오가며 진행했다. 상주 직원 1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급.
– 팬들은 창단 이전부터 매주 1개 이상의 사업자에게 제안서를 제출하였으며 수시로 미팅을 가졌다. 이 과정에서 석수앤퓨리스(현 하이트진료음료),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 키카 등의 현금 및 현물 계약을 성사시켰다. 팬들은 휴가를 내어 분기마다 스폰서에게 결과 보고를 했다. 모든 작업은 개인 사비로 이뤄졌다. 당시 K3 구단들은 기성 유니폼에 팀 이름을 새기고 리그에 참여했는데, 부천은 독자 유니폼 디자인을 활용하여 키카를 통해 생산 및 제공을 받았다.
– A보드 구매 비용을 절약 하기 위해 현재까지 스폰서로 있는 덕산파이프에서 파이프를 직접 조달하여 부천 팬이 직접 용접하여 만들었다.
– 벤치, 코너 플랙, 골대 그물, A보드 등 경기 전반에 필요한 모든 시설은 경기 지원팀을 중심으로 팬들이 경기 당일 일찍와서 설치하였고, 경기 중에는 응원을 하였다. 경기가 끝나면 모두 다 경기장으로 내려와 철수하는 작업을 하였다. 경기를 볼 수 없는 티켓 판매 업무는 아르바이트를 고용하여 해결했다. 하지만 아르바이트가 없을 때는 일부 팬들이 경기 관전을 포기하고 티켓을 팔았다.
– 미디어팀을 구성하여 선수 인터뷰 및 사진 촬영 , 기사 배포 등을 팬들이 맡아서 진행하였다. 포털 사이트 다음과 제휴를 통해 뉴스 서비스 미디어다음에 구단 소식이 수시로 게재되었다. 경기 동영상도 풀영상과 하이라이트가 매경기 올라왔다. 모든 장비는 개인이 직접 구입하여 활용하였다. K리그에서 조차 경기 영상이 올라오지 않던 시절이었다.
– 유니폼, 머플러 등의 머천다이즈 등은 팬이 직접 디자인하였다.
– 이 활동에 참여한 모든 팬들은 매 경기 입장권을 구매 하여 경기장에 입장하였고 일부는 구단 재정에 보탬이 되기 위해 복수의 입장권을 사는 이들도 있었다.
– 팬들만 참여했던 것은 아니다. 축구 관련 경력을 쌓고 싶은 자들 역시 함께 하였고 꽤 많은 분들이 부천을 시작으로 여러 프로구단으로 직을 옮기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이것은 하부리그에서 프로구단 급 경기 진행을 하고 있는 것은 당시 부천FC 1995가 유일했으며 관련 경력을 쌓기에 아주 좋은 구단이었기 때문이다.
– 100~200만 원 소액 지역 후원사 제도를 만들자, 창단 후 1~2년 후에는 팬들이 자발적으로 자신 또는 지인의 사업체를 후원사로 등록시켜 그 수가 수십개에 달했다. 팬들은 경기 전후 치킨집, 호프집 등 지역 후원사를 방문하여 돈쭐을 내는 것이 일상이었다.




2008년 3월 22일 경주시민구단과의 개막전을 갖게 된다. 잃어버린 우리팀의 경기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기대감과 감동은 하늘마저 울리게 하였는지 비속에서 경기를 치르게 되었다. 팬들 역시 진정한 우리팀의 경기를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에 그 어느 때보다도 큰 응원 소리가 운동장을 가득 메웠으며 골이 터졌을 때는 눈물을 흘리는 팬들도 적지 않았다. 경기는 김태륭의 프리킥 결승골로 승리하였으며 부천FC 1995라는 이름으로 첫 랄랄라가 부천 종합운동장에 울려 퍼졌다.
시즌 중 AFC윔블던와 결연을 맺는다. AFC 윔블던은 영국에 있는 팀으로 부천과 같은 연고이전의 아픔을 겪은 팬들이 직접 만든 팀이다. 연락은 윔블던으로부터 먼저 오게 되었는데 “팀을 잃었다 하더라도 진정한 축구팬들과 지역 사회가 무너지지 않는다는 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함께 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당시에 AFC윔블던은 극강의 수익을 추구하는 기업형 구단이 되어가는 맨유 응원을 거부한 유나이티드 오브 맨체스터와도 유대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후에 부천은 이 팀과도 연을 맺게된다.




부천 FC 1995 VS 부천 OB전
2008년 12월 당시 곽경근 감독의 제의로 부천 서포터와 부천 유공, 부천 SK에서 연을 함께 했던 선수들이 다시 만났다. 과거 부천 소속이었던 선수들이 모인 가운데 “우리를 응원해주었던 팬들이 어렵게 팀을 만들어 운영하는데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결론은 오랜만에 헤르메스도 만날겸 친선 경기를 추진하면 어떻겠냐라는 것.
많은 OB선수들이 참가 의사를 밝혔고, 당시 사간도스 감독으로 일본에 있었던 윤정환 감독까지 참가 의사를 밝혔다. 구단 창단이 있은 후 최고의 선물을 옛 선수들에게 받을 수 있었다.
* OB 참가선수 명단
조성환, 강철, 윤정환, 김기형, 박민서, 윤정춘, 윤중희, 정필석, 곽경근, 이을용, 이원식, 조준호, 이동식, 한동진, 이성재, 이상홍, 김한윤, 김대권, 최월규, 박신영, 신승호, 신현호, 최철우, 김정수, 이상훈, 최형준, 남기일, 최거룩, 김우진(김동규), 조현두, 박동우, 박철, 김은철 , 최익형, 조정현, 박효빈, 이용발
2009


우리와 같은 아픔을 겪은 팀 AFC 윔블던
2008년 자매 결연을 제의 했던 영국의 AFC 윔블던과 본격적인 교류가 시작되었다. 온라인 커뮤니티를 오픈하였으며 서로의 유니폼을 교환 하는 행사가 있었다.




월드드림풋볼매치 (부천FC 1995 VS 유나이티드 오브 맨체스터)
영국의 윔블던FC, 유맨과의 인연을 시작으로 부천은 구단의 스토리를 활용한 마케팅 전략을 짜게 된다. 참고로 2009년은 2010년에 열릴 남아공 월드컵을 앞두고 통신사들의 월드컵 마케팅에 시동을 걸기 시작한 해이다.
특히, SKT는 여러 개인과 단체의 소원을 받아 최종 심사를 거쳐 선정된 소원을 이뤄주는 내용의 프로모션을 진행했는데, 부천팬들은 팬들이 직접 만든 축구단인 부천FC 1995와 유나이티드 오브 맨체스터의 친선 경기를 한다면 월드컵을 앞두고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내용의 제안서를 제출했고, 제안서 제출 당일 부천 팬들이 SKT 본사 앞에 몰려가서 응원가와 구호를 외치며 이 제안이 꼭 통과 되었으면 좋겠다는 열의를 보였다.
결국 치열한 경쟁 끝에 부천이 이 프로모션에 함께하는 것으로 결정되어 2009년 7월 18일 부천 종합운동장에서 월드풋볼 드림매치라는 이름으로 부천과 유맨의 경기가 개최가 되었다. 이 날은 비가 내렸는데도 불구하고 2만3,320명이라는 많은 관중이 찾아와 성황리에 끝이 났다.
SKT와의 프로모션을 두고 비판이 있다. 비록 다른 사업자이지만 연고이전을 감행한 SK에너지와 같은 SK그룹에 속해있는 곳의 후원을 받았다는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부천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스토리를 활용하여 기업과 프로모션 기회를 잘 활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부천팬들은 최선을 다해서 응모 준비를 했고, 우리가 이 프로모션을 통해 구단을 한 단계 성장 시키고 싶다는 열정을 보였으며 이것이 심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모기업의 안정적인 후원으로 돈걱정없이 응원만 하는 팬들은 구단의 생존을 늘 걱정하는 팬에게 이런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 지 모를 것이다.
프로모션 진행 과정은 결코 쉽지는 않았다. 친선경기는 7월에 열렸지만 실질적인 준비는 2009년 새해가 밝자마자 이루어졌다. 그 사이에 KBS와 , SBS 다큐멘터리 촬영부터 시작해서 6개월간 이루어졌던 모든 준비를 구단 관계자뿐만 아니라 서포터들이 함께 했다.
대기업의 프로모션 그리고 이에 A매치에 준하는 프로젝트를 K3구단에서 이루어 냈다는 것은 대단한 성취였다. 부천이 성공해낸 하나의 자부심으로 여겨져야 할 이벤트이다.

2009년 12월 19일 OB와의 두 번째 친선경기가 목동 종합운동장에서 펼쳐지며 2009년의 막을 내린다.
10~11
부천FC 1995 법인 설립
이 시기 최대 이슈는 창단하면서 공표 된 10년 마스터 플랜에 따라 구단을 주식회사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단순한 법인화가 목적이 아닌 대한민국 모든 구단의 새로운 성공 사례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도전이었다.
당시 FA컵 진출, 유맨전 , 부천FC 거리 탄생 등 부천FC가 주목 받고 있는 좋은 상황에서 법인화 시도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부천시와 좋은 관계를 쌓아나가고 있던 시점에서의 법인화는 지자체와 다른 길을 가겠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이를 막기 위해 부천시와의 독자적인 협의 라인을 구축하였는데 이를 통해 구단의 계획이 폄하 되거나 부정적으로 인식되지 않기 위해 시와의 소통을 점점 늘려나갔다. 이러한 시도는 추후 프로화 시기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부천FC 1995는 2010년 초 발기인을 구성하고 12월 법인 등기 그리고 2011년 2월 27일 첫 주주총회를 열게 된다. 주식회사로 전환 후 보다 많은 시민들이 참여하고 운영할 수 있는 진정한 시민구단의 기틀을 다지게 된다.

FA컵 진출
팬들이 가장 기대했던 FA컵이었다. 토너먼트를 통해 과거의 상대팀들 그리고 제주로 연고이전한 SK와의 경기도 기대할 수 있는 대회였기 때문이다. 첫 상대는 대학의 강호 고려대였는데 신강선의 해트트릭에 힘입어 4:0으로 대파하였다.
다음 상대는 천안시청. 이 팀에는 하재훈 감독과 이원식과 남기일이 현역으로 뛰고 있어 많은 팬들의 기대를 받는 경기이기도 했다. 게다가 이 경기를 이기면 K리그팀과의 경기가 이루어질 수 있었기 때문에 승리를 갈망하는 팬들이 많았다.
이 경기에서 부천은 선제골을 획득하여 또 다른 기적을 보여주는 듯 했으나 결과는 소망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후반에 투입 된 이원식 선수의 동점골과 PK획득이라는 활약에 아쉽게도 1-2로 패배하고 말았다. 당시 이원식과 남기일이 팬들 앞으로 인사를 왔었는데 부천 팬들의 반응은 그리 좋지 않았다. 골 세레모니가 문제가 되었는데 그 주인공이 다른 선수도 아닌 이원식이었다는 것에 배신감을 느낀 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당시 선수들은 이러한 팬들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만 하더라도 전 소속팀에 대한 골 세레머니가 팬들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관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김만수 시장 당선
홍건표 시장의 뒤를 이어 2010년 7월 1일 김만수 시장이 부천 시장에 부임하게 되었다. 부천의 당시 목표는 시의 지원을 일부 받아 내셔널리그(당시 2부급에 해당하는 세미프로리그) 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소통의 중요성이 무엇보다 컸는데 부천 관내에 이미 여러 단체가 존재하던 상황에서 축구단은 신생 단체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즉, 부천시, 시설관리공단, 지역 인사 등 각 단체와 친밀도를 높여 나가며 축구단이 부천 관내에서 인정 받는 단체가 되는 것은 대단히 중요했다. 본업이 있는 비상근직 자원 봉사자들로 구성된 대표, 국장, 팀장을 중심으로 새로운 시장과 소통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이들은 모두 결국 2011년 2월 부천시와 ‘지역축구 발전과 시 홍보 사업의 수행을 위한 업무 협약’ 체결하고 연간 7,500만원 및 홈경기 안내 홍보 등의 지원을 이끌어내게 된다.
2012

부천에 녹아들기 시작한 부천FC 1995
부천FC 1995가 탄생했을 때 부천시를 비롯해 기존 부천에 있던 관내 단체에게 있어서 축구단은 그렇게 반가운 단체는 아니었다. 시에서 활동한 적도 없는 축구팬들이 모여 만든 축구단은 이들에게 생소한 집단이었으며 오히려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때문에 초기 연고 협약 문제도 쉽지 않았고 경기장 및 전광판 사용료도 지불하면서 구단을 운영해야만 했다.
하지만 구단 운영에 있어서 지역 사회와의 연계는 단순한 시민들뿐만 아니라 지자체 및 각종 관내 단체와의 협업 또한 중요하다는 것을 놓칠 수는 없었다. 이러한 배경속에 부천은 2011년에 정관 수정을 통해 구단주는 부천시장 , 단장은 부천시 축구협회 회장, 부단장은 부천시생활체육축구연합회 회장을 추대 하면서 지자체와 주변 단체와의 관계를 강화했다. 이는 서포터만의 팀이라고 도 볼 수 있던 ‘부천FC 1995’가 자발적으로 기득권을 포기하고 지역사회와 함께 구단을 키우겠다라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했다.
이것을 시작으로 부천은 부천시 체육진흥과의 소통, 시의원 및 지역 정치인과의 미팅을 주기적으로 수행했다. 서포터들은 지역 인사의 경조사까지 챙겨가며 지역사회에 서서히 녹아들어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그 결실은 2012년에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다.
물론, 각종 이해관계에 얽혀 각자의 가치관과 상충되어 팬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는 일도 있었고 여러 시각을 갖는 사람들이 구단에 들어옴에 따라 정체성의 혼란이 오기도 했다. 하지만 중심에 있던 TF의 구성원들은 창단 때의 초심을 잃지 않는다면 구단은 흔들리지 않는다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렇게 부천FC 1995는 본래 자기들이 있던 K리그로의 복귀를 준비해 나갔다.
목표는 내셔널리그 그리고 2부리그의 출범?
2012년 본래 부천의 계획은 최소한의 예산으로 내셔널리그에 진입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새로운 스폰서 영입을 위한 활동을 비롯해 부천시 그리고 지역내 인사와의 꾸준한 소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부천FC 1995는 모기업이 존재하는 구단이 아니기에 도시 홍보, 생할 스포츠 지원, 유소년 구단 운영 등의 명복으로 사업비를 할당받아 지자체와 함께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초기 부천시의 반응은 다소 부정적이었으나 주기적으로 찾아가 현재 구단에서 준비하고 있는 내용 등을 공유하며 거리를 좁히자 점점 긍정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었고 내셔널 리그 진출에 대한 목표는 가시화 되는듯 보였다.
그러던 중 대한축구협회에서 국내 리그를 재편하려는 움직임이 나왔다. 2부리그를 창설하여 프로화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2부리그 진출을 위해서는 내셔널리그보다는 더 많은 예산과 조직 확충 등 환경 개선이 요구 되었다. 확실히 결정된 사항도 아니었고 내셔널리그 예산 지원 이야기로 구단을 바라보는 지역인사들의 눈초리는 이미 매서워지고 있었다. 지차체와 함께 하기 위해서는 시의회에서 조례를 통과 시켜야하는데 이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2010년에 부천 여성 축구단이 비용 문제로 6개월만에 해체 되었던 사례가 있기 때문에 부천시는 조심스러운 입장이었다.

위기 그리고 설득의 시간
챌린저스 리그로 불리던 2부리그 창설 소식은 있었지만 초기에는 구체적인 계획이 나오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기본 방침은 내셔널리그 진출로 정하고 시즌을 이어나갔다. 이후 리그 개편에 대한 대강의 계획이 흘러 나오자 자체적으로도 논의를 했지만 당시 정황상 계획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다. 게다가 참가팀 문제 등으로 정상적인 팀 모집이 가능할까라는 의구심이 있었기 때문에 기존 계획에는 변함이 없었다.
상황이 바뀐 것은 보다 더 구체적으로 계획이 발표 되기 시작한 5월말부터였다. 참가팀도 승급팀 인센티브 등으로 인해 서서히 늘어나는 추세에 이르렀다. 이 때부터 내셔널리그와 2부리그라는 두 노선 중 어느 것이 더 좋은 선택인가에 대한 논의가 함께 시작되었다.
결론은 이랬다. 2부리그로 직행한다 하더라도 내셔널리그 진출과의 예산 차이가 크게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지금 안 가면 손해라는 것이었다. 이유는 협회의 지원 방안이 꽤 파격적이었다. 예를 들어 2부리그로 갈 시 매년 스포츠 토토 지원금(7억) 및 축구 발전기금(40억)의 지원이 있었고 가입비(5억)이 면제되었다. 게다가 드래프트 신인 선수에 대한 우선지명권을 부여받을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K리그 진출이 목표였던 부천이었기에 축구 발전기금과 가입비는 언젠가 지불해야하는 금액이었고 이것이 면제된다는 것은 큰 메리트였다. 이같은 상황에 김만수 부천시장도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따라서 부천에게 제일 중요했던 것은 2부리그 진출로 “돈이 더 드는 것 아니냐”는 선입견을 해소하고 오히려 내셔널리그와 비슷한 수준에서 구단을 창단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자 투자 대비 더 기대효과가 있다는 것을 시 각계에 이해 시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조례안 통과 때까지 이해 관계자들을 만나며 설득하고 이해시키는 일이 중요해졌다. 시민들을 대상으로 어떠한 배경에서 프로진출로 방침을 바꾸었는지를 이해를 돕기 위한 시민설명회를 개최하였다.
위기 상황도 있었다. 내셔널리그와 프로진출에 맞추어 여러가지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9월경에 기존 K3 구단 운영비가 고갈되었다. 리그 참가가 어려운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다. 다행히도 구단에 자금적 위기가 있을 때마다 사비를 들여 도와주신 분과 서포터들의 모금 활동에 의해 당장의 위기 상황은 넘겼으나 확실하게 확보가 된 자금으로 운영 계획을 짜야 한다는 교훈을 다시금 되새기는 일이 되었다. 운영비 문제가 생길 때마다 쌈지돈, 미국에서 일하며 열심히 모은 돈 등을 구단으로 송금하는 팬들의 정성으로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쉽지 않았던 조례안 통과
10월 12일 프로축구연맹으로부터 프로2부 참가에 대한 가승인이 났다. 이제는 부천시민축구단 지원 조례안의 통과만 이루어진다면 2013년에는 프로리그에 다시 등장한 부천을 볼 수 있었다. 그 기간 동안 팬과 구단 관계자들의 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고 급기야 2부리그 진출 후에도 임원 또는 비상근 직원의 무급 선언까지 이루어졌다. 구단 운영에 있어서 최대한 절약하고 투명하게 사용하자는 강한 의지였다. 어차피 K3 때 이미 임원 및 비상근 직원은 무급이었기 때문에 어렵게 결정도 아니었다.
하지만 프로로 가는 길은 계속해서 험난했다. 예를 들어 프로 진출을 위한 설명회는 시민뿐만 아니라 시의원들을 대상으로도 이루어졌다. 문제는 촉박한 일정 등으로 인해 설명회가 시의원들의 행사 일정과 겹치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고 일부 의원만을 대상으로 설명회가 이루어지게 된다. 결국 10월 18일에 열린 상임위에서 부천FC 1995 지원 조례안은 부결된 상태에서 본회의로 넘어갔다. 10월 23일에 열린 본회의에서는 시의회에 많은 서포터들도 같이 참여하였는데 재적의원 28명 중 찬성 14표, 기권 14표로 조례안이 최종 부결되었다.
재상정이라는 기회가 남아있었지만 이렇게 되면 12월이 되서야 본회의에 상정이 되기 때문에 사실상 프로2부 진출은 어려워졌다. 구단 그리고 팬들 역시 프로리그 진출이라는 것에 집중하여 달려왔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패닉상태에 이르렀다. 일부 팬들은 반대를 던진 시의원을 향해 전화, 문자, 이메일을 통해 항의하였고 그 중에는 협박에 가까운 수준의 내용도 있어 구단 관계자 및 헤르메스 대표가 직접 사과하는 일도 있었다.
시즌 운영에 대한 위기까지 같이 찾아왔다. 내셔널리그 혹은 프로 진출을 감안한 선수 영입 등 남은 경기를 치르기 위한 재정 부족 문제 뿐만 아니라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친 구단은 잔여 경기를 포기한다는 발표에 이르기까지 한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경기에 뛰고 싶다는 선수들의 마음. 그리고 팬들 역시 5년간 달려온 지난 날을 되돌아 보면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기로 마음을 모았다. 재정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 팬들의 모금이 이루어졌고 시즌을 계속 치를 수 있었다.
불행중 다행으로 11월 초 부천시는 재상정을 할 예정이라는 발표가 있엇다. 구단 관계자 역시 제로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시의원들을 설득하고 설명하며 구단 창단의 당위성을 설명하였다. 12월 3일 재상정 된 조례안은 상임위에서 만장일치로 통과 되었고 12월 5일 본회의에서 부천시민프로축구단 지원 조례안이 결국 통과되었다. 이렇게 연고이전 후 8년만에 부천에 프로축구가 다시 돌아 오게 된다. 당시 한국프로축구연맹은 부천이 2부리그에 들어올 경우, 구단이 가진 화제성, 2부리그 타 구단에 비해 두터운 팬층, 역사성 등으로 인해 리그 흥행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하고 창단 작업과 시청 설득 작업에 적극적이었다.
2013~

또 다른 역사의 시작
2013년 2월 16일 부천FC 1995는 2013년도 출정식을 열렸다. 그리고 같은해 3월 16일 수원 종합 운동장에서 열린 개막전에서 수원FC를 3대2로 격파하며 화려한 복귀를 알린다.
* 부천의 역사는 계속된다.
2013년 이후의 역사는 구단과 후세대들의 몫으로 남깁니다.
———–
‘우리들의 역사’ 이야기는 (구)부천 서포터 게시판 , (구)미디어팀 게시판, (구)TF 게시판 및 개인과 주변인들의 증언과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여졌으며 외부에 공개하기 어려운 내용은 제외를 하였습니다.
사실을 바탕에 두되 기록으로서의 역사이기에 필자의 주관이 들어가 있는 부분도 있다는 점 말씀드립니다. 또한, 내용 중 구단을 위해 힘써주신 분들의 이름은 되도록이면 공개하지 아니하였는데 이유는 이렇습니다. K3 시절 관계자급 지위에 있으셨던 분들이 가장 경계 했던 것은 주변으로부터 특권이나 권위를 누리는 것처럼 비춰지는 것이었습니다. 관계자임에도 불구하고 선수단 버스가 아닌 자비로 원정 버스를 신청해 다녔던 것이 한 가지 예일 것입니다. 이는 팬으로 돌아온 지금에도 유효하여 2025년 현재 아직 그 일원 중 한 분이 구단에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는 모든 분들이 본래의 위치에 돌아왔을 때 다시 고려해보려고 합니다.
그 밖에 구단 창단 및 운영을 위해 힘써주신 분들 중에는 정치인 및 지역인사 그리고 많은 후원사들이 있었습니다. 마음같아서는 모두 이 곳에 담고 싶었으나 정치적 문제 그리고 형평성 문제가 있어 그렇지 못했다는 점 이해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