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의 월드컵을 통해 하이텔 축구동은 한 단계 도약을 했습니다.이런 기사가 나올 때 마다 가입인원은 한번 점프(?)를 하게 되었고 더불어 기존 언론이나 기업들이 PC통신에 게시판이나 여러 서비스를 하나하나 열게 되는 해였습니다.(그래봐야 아직 회원수 천명도 안되던 시절...) 축구동에서도 여러 게시판 활동을 하는 터줏대감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그중 신동일 선생님을 처음 뵌 게 이 해이기도 합니다.제가 1994년 여름에 '낫소'에 입사해서 직장인이 된지 얼마되지 않아 직접 뵙게 되었습니다. 동대문운동장에서였지요. 그때나 지금이나 제가 노안이다보니 신동일 선생님께서 절 처음 만났을때 첫번째로 하신 소리가 "당신 72년생 맞아?" 였습니다. 자기 또래처럼 보였다고 말이죠 ㅎㅎㅎㅎ 이렇게 1994년부터 회원들끼리 서로 만나서 축구장 가서 경기 본다던가 하는 일들이 많아졌습니다.월드컵이 끝난 이후 아시안게임 보러 간다는 분도 계셨어요.아마 서로가 몰랐지만 같은 경기를 경기장에서 보고 있던 분들도 꽤 되었던 때였습니다.온라인과 오프라인과의 괴리랄까요? 게시판에서 싸우다가도 직접 경기장에서 만난다던가 해서 화 풀고 했던 건도 있었습니다. 1995년 초에 저의 인생에 엄청난 획을 그은 일이 있었습니다.축구가족의 김신기 편집장님이 "원석씨 혹시 축구관련으로 인터뷰 할 인물 없을까?" 하고 물어보셨습니다. "만화가 오일룡 선생님 어떨까요?" 축구가족에 매달 인터뷰 하는 코너가 있었는데 대부분 축구협회 관계자나 은퇴선수들 이야기만 나오다보니 뭔가 다른 인물을 인터뷰 하고 싶으셨기에 저에게 아이디어를 물어보셨던 거였겠죠. 고민끝에 내린 답이었습니다.왜 그분이냐고 물어보셔서 "그분 축구만화만 그리시는 분입니다. 굳이 축구선수 출신이나 축구팀 관련 인물만 인터뷰 하지 말고 가끔 이런 분도 올라오셔야 하지 않을까요?" 라고 답하니 혼쾌히 승락해 주셨습니다.인터뷰는 정작 제가 했습니다. 바쁘셔서 저보고...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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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이 되었습니다.1993년이 하이텔 축구동 만드느라 정신없이 지났습니다. 1993년 말에 PC통신에서 언론을 뒤흔드는 건을 제공했습니다.일본 울트라 니폰이 걸어놓은 현수막 KEROA 였습니다.물론 O와 E 자리에 바꿈을 표시하는 양방향 화살표를 붙여놓아 '오타'라는 것을 표시한 듯 했지만..."이거 일본어로 '하인'을 뜻하는 게로아를 표현한거 아녀?" 라는 말이 나온게 PC통신의 SPORTS란이었습니다. 이전까지는 기자들이 웬만큼 이런거 아는 분들이 드물어서 이건거 잘 못잡아냈습니다.아니 그건 지금도 그렇습니다.지금 SBS의 유튜브 채널에 나오는 고참기자인 '권종오 기자'가 만드는 영상 클립도 보면 이런 부분들은 전혀 잡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일본의 유도영웅 다무라 료코의 별명 '야와라'가 우라사와 나오키가 그린 만화 '야와라'에서 따온 것을 전혀 설명하지 못합니다. 이런 예들은 수두룩합니다.이런거 잡아내 준게 PC통신들이었기에 많은 언론에서 PC통신을 점점 주목하게 되고 'PC통신 이용자 의견' 이라는 이름으로 하나둘씩 나오다가 1995년 넘어가면서 '네티즌 의견'으로 나오게 되죠.여튼 '게로아'건은 하이텔 축구동의 작품이라고만 할 수는 없고 여러 PC통신 이용자의 작품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걸 전달을 한건 저였습니다.) 이제 1994년이 되자 미국월드컵에 대한 관심이 뜨거워졌습니다.대표팀은 1월부터 소집되서 2월에 미국으로 날라가 현지적응훈련을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이때 축구동 부시삽 중 한명인 ToiEtMoi문선희 님이 저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친분있는 선수들에게 물어봤는데 숙소 놀러오라더라. 간 김에 하이텔 축구동 채팅방에서 선수들과 채팅 한번 주선할까?" 어어???PC통신의 다른 동호회들 중에서 몇개 동호회에서 이런 이벤트가 있었습니다.보통 게임회사의 게임 발표할 때나 MS나 HP 같은 큰 회사에서 부서 장이 개인 자격이나 회사 대리의 자격으로 제품설명회 같은 것을 온라인으로 이렇게 한 적이 있긴 했거든요.근데 그건 IT관련...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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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호회가 만들어지고 글들이 우르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그러자 이야기가 나온게 '오프라인 활동' 이었습니다.글로만 하는게 아니라 직접 뛰어보자는 거. 그래서 조기축구회처럼 팀을 만들어보자고 했습니다.가칭으로 'FC2002'라는 거 어떠냐고 제가 발제를 했고 다른 분들이 OK해 주셨습니다.네 아시다시피 그때 대회개최지 결정은 안났지만 유치경쟁이 엄청 불 붙었던 때입니다.그래서 2002라는 말을 팀이름에 넣자고 했는데 바로 OK사인 내 주시더군요.모임은 연세대학교 운동장에서 자주 있었습니다. 거기 조기축구회하고 같이 쓰면서 매주 주말에 모였습니다. 저는 어쩌다 한번 나가는 정도였고 정기적으로 나가지는 않았어요.여튼 여기서 활동하는 많은 분들이 이후 제 뒤를 이어 대표시삽으로 계속 하이텔 축구동을 이끌어주시게 됩니다. 이렇게 동호회 활동이 하나 더 확장되었습니다. ----------------------하이텔 축구동 초창기에 어떤 한 분이 가입하셨습니다.혹시 여러분은 'SOCCER KOREA' 라는 인터넷 사이트를 기억하실까요?이거 기억하는 분 계시다면 진짜 올드팬이십니다. 지금은 여기저기서 쓰고 있어서 '쇼핑몰 아니냐' 하실수도 있는데.... 아닙니다. 당시 한국에서 인터넷 접속할 수 있는 대학교는 한손 안으로 꼽을 수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제가 다녔던 광운대학교였습니다.그리고 SOCCER KOREA는 포항공대 호스트 쪽에서 나왔습니다. 처음엔 광운대의 네트워크 동아리 'K-NET'에서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서칭하다가 발견했다면서 저에게 알려줬습니다. K-NET은 당시 정식 동아리는 아니었지만 이미 네트워크실의 죽돌이/죽순이 들이었고 거기서 전 하이텔 동호회 시삽이라고 1기로 합류시켜 줬습니다. 거기서 전 인터넷을 처음으로 접해봤습니다. 어쨌던 한국 축구관련 인터넷 주소가 있다는 것은 정말 신기해서 슬쩍 돌아보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거 운영하는 분이 하이텔 축구동에 가입했다고 하시더라구요.네, 포항의 올드팬이신 서동렬 님께서 운영하던 당시 영어로 한국 축구에 대한 소개를 올린 사이트가 바로...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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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즈음 해서 하이텔 본사에 한번 들러야 했습니다.이후에는 사라졌지만 그때만 해도 새로 만들어진 동호회 대표들에게는 '교육'이 있었거든요.하이텔의 메인 게시판은 아니지만 그래도 하이텔 시스템의 일부의 글(컨텐츠)에 대해 [삭제] 권한이 있던 만큼 저작권에 대한 간단한 교육과 동호회 운영을 위한 여러 게시판 명령어. 운영메뉴에 대한 안내 게시판 글의 삭제명령, 게시판 이름 바꾸기 등에 대한 것들에 대한 짧은 교육이었습니다. 부족한 교육일지 몰라도 새로 만들어지는 동호회 대표들과의 잠깐이지만 얼굴 마주치는 기회를 가질 수도 있었고 해서 케텔 시절부터 계속해서 있던 교육이었다고 합니다.그리고 하이텔 축구동이 생긴 1993년 9월을 계기로 이 교육은 없어졌습니다.최후의 교육이었죠. 왜 그렇게 되었는지 나중에 알고보니 '소모임' 서비스의 신설과 동호회 개설이 쉬워지면서였습니다.동호회 개설이 이전처럼 연 2회가 아닌 매월 열게 되었고 이와 함께 '소모임' 이라는 서비스가 열리게 되서 너무 많은 게시판들이 열려버리게 되었다는 거죠. 그래서 이런 교육을 하기가 쉽지 않게 된 겁니다.제가 교육 받을 때만 해도 20여명밖에 안될 정도로 '동호회 개설' 이라는 것 자체가 당시 빡셌습니다.제가 듣기로는 서너번 '빠꾸'당한 곳도 있다고 들었습니다.그걸 한방에 뚫었던 겁니다. 분명 축구와 야구가 인기있는 스포츠인데도 오레된 케텔에서도 동호회가 없던게 의아했었는데 이때야 알았어요. 그만큼 케텔-하이텔에서 동호회 하나 만드는게 대단한 거였습니다. 그리고 공지된 개설일 00시.sysop ID로 로그인을 했습니다. ID : k2soccer 역사적인, 이 나라 최초의 온라인 축구동호회의 운영자 아이디입니다.여러 통신사별로 이런 '시삽 ID'는 규칙이 있었고 일반인들은 절대 불허되는 ID였습니다.하이텔은 k2로 시작되는 아이디가 시삽 아이디였고 후에 만들어지는 나우누리는 now로...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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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들고 하이텔에 들어간게 6월 말이었습니다.이때 한번 항의를 쎄게 했습니다. "이렇게 기사까지 나왔습니다. 여기서 아직 하이텔이 승인해주지 않았지만 활동중이라는 내용까지 있습니다. 저희 말고도 준비하는 다른 동호회들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사태가 오래되면 하이텔도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강하게 이야기를 했습니다.난감해 하시더군요. 결국 처음 저희를 담당하던 분은 곧 그만두시고 담당자가 바뀌었다는 연락을 7월초에 듣게 되었습니다.괜히 들고갔나...싶었지만 멈출 순 없었습니다. '야구동호회하고도 함 연합해 볼까?' 하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고 하이텔의 sports 란에는 슬슬 '동호회가 정식 개설이 안되고 있다'는 글들이 여기저기서 올라오고 있었습니다.게시판 하나로는 야구동호회건 축구동호회건 불만이 계속 쌓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글을 쓰는 ID가 겨우 20여개만 보이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이 기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로 했고 이미 진행시켰죠.6월22일에 스포츠 서울 보라고 슬쩍 스포하고 그리고 22일에 이렇게 기사 나왔다고 21일 오후6시경부터 sports란에 글을 썼습니다.기사나왔다고 좋아하는 축구동 분들도 많았지만 반면 분노하는 분도 계셨습니다. 하이텔 뭐하는거냐고 말이죠. 이를 기점으로 하이텔 내에서 파업에 관한 여론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이런저런 게시판들이 불편외에도 '이거 운영 뭐하는거지?' 하는 말들이 나왔죠. 김신기 편집장님의 작전이 성공한 거였습니다.7월 말이 되었습니다.하이텔 측에서 본사에 함 와달라고 하더군요. 갔습니다. "늦어도 9월에는 이야기가 나올겁니다. 제발 그때까지 참아주세요"> 앞으로 두달 정도요? 아니 그동안에 뭐가 바뀝니까? 일단 담당자분이 지금 바뀌었군요."네 제가 책임지고 9월까지는 해결하겠습니다" 뭔가 달라져 보였습니다.그리고 그동안 김신기 편집장님은 계속 하이텔 축구동이 활동하고 있는 걸 보여주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저를 비롯한 몇몇이 '축구가족'에 글을 쓰기로 한 것이었습니다. 어차피...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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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하이텔 축구동호회의 운영진 변화가 있었습니다. 여성 부시삽이었던 jjeowl정지은 누님이 부시삽을 사퇴하셨습니다.당시 "한도컴퓨터"에서 근무하셨는데 회사 업무가 빡세지기 시작했다고 하셨어요. '한도컴퓨터'라는 회사는 한글카드로 유명한 회사였습니다. 당시는 PC의 OS가 윈도우나 리눅스가 아닌 DOS였습니다. DOS는 기본적으로 영어만 가능했고 한글을 쓰려면 소프트웨어적으로 특정 어플에서만 구현되던가(한글 같은 워드프로세서가 그랬죠. 그래서 한글 저장시에 보면 KSSM, KS5601이라는 텍스트와 한글 HWP는 다른 저장방식이었습니다) 한도에서 나온 [도깨비] 라는 카드를 슬롯에 장착하고 메인 메모리에 DKB4(1990년대 초반의 버전이 4버전이었습니다)를 띄워놓고 특정 명령어키로 한글을 억지로 구현시켜야 했습니다.물론 윈도우3.0, 3.1의 한글화 버전이 나오고 OS가 WINDOWS95가 나오면서 현재와 같은 GUI식으로 바뀌며 도깨비5 버전이 마지막이 되었습니다만. 이때 jjeowl정지은 누님은 한도에서 스프레드시트(엑셀 프로그램이라 생각하심 됨)개발을 하고 계셨었는데 이 부분 개발관련으로 난항을 겪고 있던 것으로 압니다.이 '한도컴퓨터'는 지금도 있는 회사입니다. 어찌되었던 jjeowl정지은 누님 이후에 ToiEtMoi문선희 님이 후임자로 지원하셨어요.이분도 나름 대단했던 분입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에 계셨었는데 이때 대한민국 올림픽 대표팀에 자원봉사를 스스로 나서셨던 분이었어요. 근데 그건 모종의 이유로 중간에 그만두셔야 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또 풀겠습니다. 관련해서 문선희님이 대한민국 최초로 행한 건이 있습니다.앞서 '하이텔 축구동호회는 한국 축구문화와 인터넷 문화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문장이 있었죠. 그 기여중에서 ToiEtMoi문선희님의 활약이 있었습니다. 이건 추후 글에서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여튼 하이텔 파업 기간동안에 이런 일들이 계속되다보니 많이 지쳐있는 상황에서 김신기님의 이 제안은 큰 힘이 되었습니다.홍보를 크게 해 보자는 제안과 함께 곧 연락이 갈거라고 해 주셨습니다.어떤 일일까 했는데 일주일 정도 뒤에...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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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의에 빠져 있으면서 일단 지켜보기만 했던 어느 날 메일이 날라왔습니다. "축구협회 기관지 '축구가족'의 편집장 김신기입니다. 언제 한번 뵈면 좋겠습니다.연락처는 XXX-XXXX 입니다" 에??? 이게 뭔일이지?축구협회에 기관지가 있었다고? 첨 듣는 이야기였습니다.그럴 수 밖에 없던게 외부에 안돌고 그 안에서만 도는 잡지였으니까요. 그러니 축협 직원이나 관련자가 아닌 저는 당연히 몰랐죠.일단 궁금하기도 해서 연락했습니다. 편집부는 여의도에 있었습니다. 축구협회 내에 있지 않았어요.알고보니 정몽준 회장이 만든 잡지나 다름 없었습니다. 여의도의 한서빌딩 안에 있었습니다. 다행히 집 근처에 여의도로 가는 버스가 있고 그 버스가 한서빌딩 근처에 섰습니다. 대신 뺑뺑 돌아갔습니다. 그땐 지하철 5호선 없던 때고 환승할인도 없던 때라서 그냥 한번에 그 버스 타고 갔습니다. 여튼 편집부에 들어서자마자 김신기 편집장님이 굳게 악수하셨습니다.PC통신을 여러 이유로 하고 있었는데 하이텔에 축구동 있는걸 얼마전에 알았다고 했습니다. 대표팀 경기를 모여서 보러 간 것도 알고 계셨어요.지켜보고만 계셨는데 도와주고 싶다면서 연락을 하신 거였습니다.와...너무 기뻤습니다. 축구협회 분들이 우리 움직이는걸 이렇게 알고 계셨다니. 그리고 놀라운 일이 또 벌어졌습니다. 당시 인기작가인 고원정 선생님이 쑤욱 들어오시더라구요.고원정 선생님을 저에게 소개시켜 주셨습니다. 어안이 벙벙했습니다.당시 [최후의 계엄령] 이라는 소설이 대히트를 쳤는데 집필실이 바로 위층이라는 겁니다. 거기다 고원정 선생님도 축구 아주 좋아하신다고 하면서 자주 오신다고 했습니다.이 인연으로 유치전에 활발하게 진행 될 때 MBC에서 만든 축구 다큐멘타리를 고원정 선생님이 집필하셨는데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 축구의 최초의 A매치가 열린 경기장을 찾아내는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낸 것이 저였습니다. 잠깐 옆길로 가서 이야기 하자면 이때 축구협회에 이런거...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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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게토레이배 축구대회 관련해서 결국 하이텔에서 가장 큰 동호회인 [OS 동호회]의 대표분을 만나서 상의도 했었습니다.OS동호회는 용산 선인상가 21동 꼭대기층에 매장을 가지고 있었죠.당시 OS동호회라 하면 PC통신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절대적인 영향을 가진 동호회였습니다. 가장 크고 가장 많은 회원수를 가지고 있는데도 PC에 있어서 초고수들도 많았습니다. PC관련해서 최초의 공동구매를 주관하고 운영한 곳이 바로 OS동호회였습니다.그러니 '동호회 모두 참여'하는 뭔가를 하려면 여기를 가야 했지요.회원수만 30만이 넘는 거대동호회였습니다. 지금 봐도 회원수 30만이 넘는 동호회면 '듣보르잡'동호회 아니잖아요? 근데 30년전에 30만회원? 엄청난 동호회인거죠.하이텔 축구동이 '더부살이'하던 고전게임동호회도 10만은 넘는 회원수를 가지고 있었지만 OS동호회하고는 쨉이 안됬습니다.'하이텔 10대 동호회'를 '서비스이용시간'으로 서열정리를 했는데 OS동호회는 하이텔이 서비스 완전종료 하기 전까지도 1등 자리에서 거의 내려와본적이 없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스포츠관련 동호회는 10대 동호회에 들어갔던 것은...1997년 10월-11월에 하이텔축구동호회가 딱 두번 들어갔었습니다. 당연 붉은악마 열풍 덕분이었죠. 야구동도 10대 동호회에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과는 많이 다르죠. 여튼 OS동호회 대표님을 통해 어떻게 진행할지에 대한 이야기를 진행시켰습니다. 몇가지 안을 보여드렸고 OS동호회의 대표님도 '좋은 뜻인데 이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모이게 하나요?'가 문제가 되었습니다.힘들지만 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아마 경기 장소는 특정한 곳 몇군데에서 나눠서 해야 할것 같다고 했고 경기방식도 45분 풀타임이 아닌 30분 타임 등...많은 이야기가 진행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만나서 진행하려는데 2주만에 전화 한통으로 바스스스 무너졌습니다.이게 무슨 일이었을까? 당시 PC통신쪽을 뒤흔드는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하지만 일간신문에는 그냥 1단짜리 짧은 기사로 나오는 정도였습니다. "하이텔 노사분쟁으로 인해 일부 서비스 지장" 이거...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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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토레이배 3on3 농구대회를 기억하십니까? 1990년대 초반에 3on3이 인기를 얻자 게토레이가 후원에 나서 만든 대회입니다.상당히 핫했죠.위키백과에서는 한국에서 3on3의 시작을 2015년을 시초라고 하지만 실제는 아니었습니다. 1990년대부터 이미 3ON3 대회는 있었고 음료회사의 지원도 있었습니다.그 3on3에 대해서는 하이텔 축구동호회의 지분도 어느정도는 있지 않았을까? 하는 에피소드를 하나 소개합니다. 후원업체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james008 양현덕 님은 게토레이와 접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축구대회를 열어보는 것에 대해 접촉했고 승인을 받아냈습니다.와...이거 만든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게 되나?양현덕님의 그런 진행능력은 정말 좋았죠. 좋은 소식을 가져오자마자 바로 하이텔의 모든 동호회가 몇개인가를 놓고 숫자를 세기 시작했습니다.대략 300개가 넘었습니다. 회원수는 몇명인지도 알아보고 해서 이런 DB가 쌓였습니다.월드컵 지역예선 시뮬레이션 표 만드는 느낌이었습니다.본선 티켓을...분야별 동호회별로 몇장을 줘야 할지. 그리고 동호회 숫자가 적은 분야는 몇장 줘야 할지 아님 회원수 별로 또 몇을 해야 할지...그러면 특정 동호회는 2장 이상을 둬야 할지 고민고민이 계속되었고 안을 계속 만들면서 이때 운영진 넷은 몰래 채팅방을 만들어서 이야기 하느라 바빴죠. 그런데 고전게임동호회의 이순화 대표시삽님이 소식을 하나 알려주게 됩니다."조만간 신작게임 발표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에 축구동호회 소개 시간을 만들까 하는데 어떠세요?"두말할 것 없이 승낙했습니다.발표하는 게임은 RPG게임의 명작 중 명작으로 꼽히는 '울티마'.정확히는 '울티마 7'의 속편 "Serpent Isle" 의 발표회였습니다. 발표 장소는 용산 "전자월드" 건물 지하의 하이텔플라자(장소이름이 맞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였습니다. 하이텔 플라자는 여기 말고도 나중에 대학로에도 생기고 했거든요. 뭐 지금은 다 사라졌습니다. 전자월드 지하의 그 큰 세미나장도 지금은 어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튼 순서는 울티마...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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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동호회 게시판이 고전게임동호회에서 열리기 전에 전 국민은행으로 달려가서 대표팀 경기 입장권을 샀습니다.당시 월드컵 지역예선 1라운드가 진행되고 있었을 때였죠.당시는 홈&어웨이가 아니라 한군데에서 모여서 예선전을 치루던 때입니다. "은행에서 표를 팔아요?"라고 하실수 있겠지만 그땐 온라인 예매라는게 없었어요. 다 현장에서 사던가 특정 예매처에 가서 표를 사는 방식이었습니다.당시 국민은행도 월드컵 예선전의 스폰서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은행은 웬만하면 전국 곳곳에 있다보니 접근성이 그나마 나은 편에 속해서 이런 방법을 썼을 겁니다. 어쨌건 그렇게 예선전 전부 표를 샀습니다.전 경기를 볼수 있게 되었어요. 아니다 결국은 한경기 빼고 다 보게 되었네요. 기본적으로 홈&어웨이가 FIFA의 원칙이지만 아시아지역이 워낙 넓은데다가 가난한 나라들이 많다보니 1986년 월드컵 예선을 제외하고는 1998년 최종 라운드 이전까지는 올림픽이건 월드컵이건 지역예선은 한군데에 모여서 경기하는게 거의 정해진 수순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되려 '홈&어웨이'로 치뤄지는게 특이한 케이스였죠. 마침 같은 학교의 선배인 안범용 선수가 골키퍼로 선발되었습니다. 응원하러 갈 겸사겸사로 당시 입장권을 다 사버렸습니다. 강의는 째버리고...그 덕분에 나중에 교수님들에게 꽤 혼났죠.경기는 선수들과 같이 봤습니다. 아시겠지만 엔트리 22명을 뽑았어도 벤치 멤버 외에는 경기장 관람석에서 봐야 했거든요. 그래서 안범용 선수도 경기장 관람석에 있었고 안범용 선수 외에도 최영준(네 전 부산 감독님 맞습니다) 선수 같은 분들과 같이 경기를 봤습니다.그리고 전 이런 이야기들을 게시판에 글을 써서 올렸죠.그런데 어느 순간 게시판에 이런 글이 올라왔습니다. "마지막 경기 바레인 전은 일요일에 하는데 경기 같이 보죠?" 어?그거 괜찮은데?야 그거 좋다. 하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고 전 그동안 갔었던 경험으로 경기장 지형을...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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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텔 sports 게시판은 [축구동]이라는 말머리를 쓰는 분들이 앞서 발기인 신청해 준 30명을 넘었습니다. 굳이 제한을 두지도 않았습니다.'하이텔에 축구동호회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에는"아직은 없지만 3월에 신청 예정이다 올해 상반기 안으로 만들어진다. 그때까지는 여기서 [축구동] 말머리 붙이고 활동하시면 된다"는 답변을 했습니다.야구동도 같이 이런 활동을 하니 몇페이지에 걸쳐(한페이지에 글은 보통 20-25개 올라가는 것으로 기억하네요) [축구동] 또는 [야구동]이라는 글만 있는 거였습니다. 거기다 이제 시즌 시작되니 당연히 관련 글들은 많아졌죠.학기도 시작했습니다.전 졸업반이었고 다행히 졸업논문은 없었습니다. 학교생활은 조금 소홀해 지기 시작했습니다.솔직히 낮에는 수업하고 밤에는 집에와서 PC통신으로 게시판 보고 하는 일을 계속하다보니...그래서 집에서 혼나기까지 했습니다.전화비가 15만원 나왔다는 겁니다. 당시 PC통신은 전화선을 사용했고 모뎀 속도는 2400bps 였습니다. 이거 속도 지금으로 따지자면 지금은 MB를 넘어 GB급으로 가지만 이건 KB급인 겁니다. 2KB. 아니 정확히는 0.2KB급이라 해야 할까요?당시 PC통신은 애니메이션이나 영화에서 글자 타이핑하는 식으로 페이지 하나 열면 한줄한줄 나오거나 운 좋으면 몇줄 나오거나 하던 때였고 1Mb 짜리 파일 하나 받는데 시간 단위가 걸리던 때였습니다.당시 대항해시대 1편 디스크 세장짜리 정확히는 2D 디스크 세장이니까 1Mb도 안되는 용량 받는데 두시간 넘게 걸렸습니다.그런데 그게 다 전화요금으로 나왔습니다. '스티븐 레비'의 저서 '해커'라는 거 보면 이 전화비 아끼기 위해 '블루 박스' 라는 전화해킹 기계 만드는 이야기가 꽤 나옵니다. 이 당시 PC통신 해 본 사람중 전화비 10만원 이상 안내봤다 하면 진짜 라이트 유저 인정하겠습니다. 나중엔 월정액제가 나오지만 그땐 그런거 없던 때였습니다. 공중전화 3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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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008과 처음 메일을 주고받았을 때와 직접 만날때까지는 2주가 넘는 시간차이가 있습니다.그 이유는 james008이 '호주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알려온 것입니다.호주에 무슨 일로? 바로 그때 2월에 호주에서 U-21 청소년대회가 열렸습니다. 고 조진호 부산 감독이 뛰었던 그 대회죠. 최용수 감독도 이때 대표팀 원톱으로 뛰었던 대회로 기억합니다. 이 대회를 보러 보름 정도 호주에 갈거라고 했습니다.지인 몇명과 같이 비행기 가서 현지 교민 집에서 자고 경기장에 가는 식으로 경기보고 응원하러 간다고 했습니다. 음...축구동호회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원정응원을 가는...네 초창기 활동은 그렇게 처음부터 좌충우돌이었던 거죠. 의외의 '최초' 기록들이 은근 있습니다. 그 이야기들도 다 풀어나갈께요.'칸타타 선언'보다 더 앞선 '온라인 축구동호회의 나갈 길'에 대해 선언했던 적도 있고 해요 ㅎㅎㅎ 어쨌던 james008님은 돌아오자마자 아직 여독이 풀리지 않은 상황에서 교보문고에서 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축구동 이야기 보다 호주가서 축구경기 본 이야기부터 먼저 시작했죠 고생했다고 했습니다. 나중을 생각해 보면 붉은악마의 1998 프랑스 원정의 프롤로그판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언젠가 제가 그 이야기를 할 날이 오겠죠. 1998년 다녀와서 하이텔 축구동과 나우누리 축구동에 무려 30여편이 넘게 글을 올렸으니까요. 본격적으로 축구동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james008이 왜 축구동 대표가 될 수 없었냐면 당시 하이텔 규정 때문이었습니다. "동호회 시삽(sysop : system operator의 약자입니다. 보통 게시판 운영관리자를 이렇게 불러요)은 하이텔 이용요금 연체기록이 없어야 한다" james008 양현덕님이 호주 가 있는 동안 하이텔 이용요금을 안낸 겁니다...아이고....집안에다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식구들이 그거 내는거 깜빡했다는 겁니다. 뭐 이런저런 요금들 며칠 늦더라도 연체료 얼마 내고 끝이지 크게 문제되는...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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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일로 어디서 만날건지를 주고받으면서 의논했습니다. 나중에 나우누리에서 나오게 되는 '쪽지' 기능이 당시에는 없었고 핸드폰도 지금같지 않던 시절이었죠. 1996년인가? 1997년인가에 '씨티폰' 이라는게 나오고 PCS라는 놈이 나오면서 핸드폰이 일반화 되었죠. 이땐 그런게 없었기 때문에 만나는 것도 무슨 스파이 접선하듯이 봐야 했습니다. 다행히 하이텔 서비스 안에 '채팅방' 서비스가 있었습니다. 무작위로 대화방제목을 정하고 만날 수 있는 서비스였고 여기서 비밀방도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james008을 채팅방에서 만났습니다.서로 인사말을 주고 받은 뒤 james008의 채팅줄에 나온 글은 이거였습니다. '축구동호회 만들어 봅시다' '제가 [축구동]말머리를 쓰는 사람들 ID숫자를 세어보니 30명은 넘는거 같습니다. 그중 가장 글 열심히 쓰는게 Tirano님이라 먼저 연락드렸습니다. 동호회 가능할것 같습니다' 두근거렸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여럿 했고 조만간 보기로 했습니다.그리고 james008을 만나기 전에 Lovetree라는 분과도 친분을 쌓게 되었습니다. 그분도 축구동호회 만드는데에 큰 관심이 있다고 했어요. 그래서 역시 그분도 채팅방에서 따로 만났고 james008이 축구동호회 만드는데 앞장서겠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조만간 직접 만나기로 했다고. 그러자 Lovetree도 같이 보자고 하더군요. james008에게 이 말을 전하니 같이 보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만나기로 했습니다. 만나는 곳은 교보문고로 정했습니다. 지금이나 그때나 교보문고가 편했죠.만나는 곳은 12번 서가. 그때 12번 서가가 취미관련 서가였고 거기에 축구관련이 있다보니 축구관련 책 꺼내서 보고 있겠다고 했습니다. 핸드폰이 없는 시절이니 당연히 그렇게 자신의 인상착의와 특징적인 거 하나씩 정해놓고 봐야 했습니다. 이걸 당시 "007 미팅"이라 했어요. 맨 처음 나온건 Lovetree 였고 바로 james008도 왔습니다.이게 하이텔 축구동을 만든 역사적인 첫 만남이었습니다. james008은 케텔 시절부터...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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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2월 당시 하이텔 서비스의 '동호회' 중에서는 축구동호회 뿐만 아니라 야구동호회도 없었습니다.의외이실지 모르겠지만 그랬어요. 아마도 당시 '동호회'라 하면 특히 스포츠/레저 쪽의 동호회는 실제로 모여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만든 동호회들만 있었습니다. 테니스 동호회와 스키동호회가 실제로 있었죠. 하지만 축구/야구는 없었습니다. 축구는 이미 '사회축구인'으로 불리는 조기축구회들이 있었고 이들은 이미 전국단위의 조직으로 조직완성이 되어 있던 때입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PC통신'을 하는 분들은 진짜진짜 아주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지금와서 생각해 봐도 전국적으로 조기축구회를 나가는 분들 중 PC통신을 하시는 분들은 100명도 안되었을 거에요. 제가 컴퓨터공학 전공자인데도 제가 다니는 학부 300명 안에서도 PC통신을 하는 사람이 20-30명(하이텔 말고 까지 천리안 포함)정도밖에 안되었고 광운대 안에서도 나중에 K-NET이라고 하여 [PC통신 대학교 동아리]도 10여명이서 만들었었습니다. 이 부분은 나중에 좀 충돌되는 부분이 있지만 이건 또 설명할께요. [축구/질문] 하이텔 축구동호회는 왜 없는거죠? 이 글은 1992년 sports 게시판을 달구는 엄청난 파장을 몰고왔습니다.답은 '현재는 없다' '글쎄요? 만들어질 만한데 안만들어졌네요'이러면서 야구 좋아하는 분들도 '그러고보니 야구동도 없네?' 하며 어느 순간부터 하이텔에 야구동호회를 만들려는 모임이 생겼습니다. 그러며 sports 게시판에 [야구동] 이라는 말머리가 붙은 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 몇몇도 [축구동] 이라는 말머리가 붙은 글을 올리기 시작했구요. 당시 명령어창에는 list 명령어의 약자로 Li, LT 명령어가 있었습니다. Li는 ID로 찾는 것 즉 글쓴이로 찾는 거였고 LT는 제목에 쓰인 단어로 글을 찾는 거였습니다.저도 어느 순간 LT 축구동 이라는 명령어로 sports게시판에서 축구관련글을 찾기 시작하고 [축구동] 이라는 말머리로 글을...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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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PC라는걸 처음 만졌죠.AT(그러니까 286)에 램 1MB, 40MB 하드 달린게 제 첫 컴퓨터입니다.당시 하드 달고 모니터에(SAMTRON 14인치...) 256색 나오는 VGA카드 달았다고 '고오급 컴퓨터' 쓴다는 소리 들었던게 저였습니다. 컴공과다 보니 주로 썼던게 개인적인 공부를 위한 Basic 언어와 C언어 공부 때문에 샀습니다. 학교에서 PC실습은 아주 힘들던 때입니다. 하드디스크도 없는 386 SX컴퓨터에 부트디스크와 프로그램디스크 작업저장디스크 3장을 가지고 다니면서 작업했었던 때입니다.(DOS버전 3.3을 일부러 가지고 다니기도 했고...PCTools는 필수로 쓰던 때...) 실습실이 두개 있었는데 PC는 40여자리 밖에 없어서 그 자리 놓고 경쟁이 엄청났었죠. 당시 저는 게임을 잘 몰랐던 시절입니다.그러다 학교 PC실에서 게임하던 동기들을 보면서 플로피로 그냥 카피해오고 했는데 그때 그 친구들이 게임을 어디서 가져왔는지 몰랐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하이텔 서비스의 여러 게임동호회의 자료실에서 다운받은 것들이었죠. "하이텔이 뭐야?" 하고 궁금했던 저는 1992년 여름방학 때 교보문고 가서 PC통신 하이텔 관련 책을 하나 사고 그때 인기였던 삼국지2 관련 책을 샀습니다. 이게 제가 PC통신을 해 보고 싶던 것의 시작이었습니다. 여튼 PC통신이라는 것을 시작한 것은 1993년 2월 경이었습니다.1월에 성수동에 있는 앨범공장에 새벽 출근/밤늦게 퇴근하면서 받은 알바비 20만원 받아서 모뎀을 샀습니다. PC통신을 그때 이미 하던 친구의 도움을 받아 2400BPS/MNP 모뎀을 컴퓨터 메인보드의 빈 슬롯에 꽂아넣고 전화선을 근처 전파사에서 사와서 안방에 있던 전화플러그에 연결한 뒤에 처음으로 하이텔에 접속했습니다. ATDT 7XXXXXXXXX 그게 지금까지 굴러올 스노우볼이 될줄은 꿈에도 볼랐습니다.
양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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